
너무나 사랑이 강조되고 흔히 사용되어서 그렇지, 사랑이 켜켜이 쌓여 형성되는 정이야말로 사랑의 상위 개념인 것 같다. 사랑이 한층 숙성되고 정제되는 과정에서 세월이 녹아들어 정이 탄생된다.
사랑은 한다고 하고 정은 든다고 한다. 이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이라는 요소가 필수적이다. 정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충동이다.
정이 없다면 인생의 아주 많은 가치있는 관계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연인 등도 정이 없다면 관계가 성사되거나 유지되지 않는다.
부부가 사랑으로 사는 것보다 정으로 산다고 하지 않는가? 정은 남녀 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대상도 아주 폭이 넓다. 사랑보다 깊고 넓은 것이 정인 셈이다.
영어에서 사랑은 러브이지만 정은 쉽게 표현하기 힘들다. 그만큼 정은 한국적인 정서에 가깝고 우리 민족은 따뜻한 정서가 풍요롭다는 방증 아닐까?
사랑에 빠지다와 정이 들다로 표현하는 한글에서는 둘의 차이는 시간의 차이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정말로 한글의 표현이 기막히다.
사랑과 정의 또 다른 차이점은 미운 사랑은 없지만 미운 정은 있다는 것이다. 그 말속에는 미운 짓하는 사람의 이면에는 자신의 숨겨놓은 사랑을 알아달라고 투정하는 경우도 많음을 알고 만든 말인 것 같다. 어쨌든 간에 정은 사랑보다 깊고 오묘한 것이다.
얼마 전 군간부를 사칭한 20대 청년이 자신의 승용차로 민간통제구역 너머로 갔다. 그로 인해 군기강 문제가 크게 사회이슈가 된 적이 있다. 그런데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민간통제구역 너머로 들어간 이유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는 간첩이 아니라 단지 그가 전역했던 군부대를 한번 가보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그에게는 미운정 고운정 들었던 자신의 부대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의 지나간 청춘을 다시 보고싶었는지도 모른다.
군 복무시절 당시에는 힘들었을지 몰라도 자신의 인생의 일부였을 시간이었으므로 그 어떤 휴양지보다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 영화 ‘샤퍼(sharper)’에서는 정을 갈구하는 남자 주인공이 사랑을 미끼로 돈을 뜯어간 여자 사기꾼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돈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라는 설정이 와닿는다.
정이 부족한 사람들은 정을 갈구하고 돈이 부족한 사람들은 정을 악용한다. 하지만 정을 이용하는 악인들이라고 해서 정도 없고 양심이 없는 건 아니다. 영화 속 정답은 그 중간인 것 같다.
영화 ‘샤퍼’는 맨해튼의 억만장자를 사기 치려는 사기꾼들 이야기이다. 서점을 홀로 운영하는 주인공 톰은 서점에 들른 뉴욕대 박사과정 중이라는 산드라를 알게 된다.
산드라는 부모를 잃고 남매만 사는데 남동생의 돈 문제로 힘들어 한다. 알고 보니 톰의 아버지는 헤지펀드를 운영하는 거부였고 그는 산드라에게 거액을 빌려준다.
하지만 산드라는 과거에 마약을 복용해 가석방 중이었고 가석방 담당관을 만나던 중 사기꾼 맥스가 나타나 그녀를 곤경에서 구해준다.
그는 산드라에게 사기에 이용할 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거짓말 기술을 가르친다. 궁핍한 처지의 미인들을 훈련시켜 남자를 진정한 사랑(?)에 빠지게 해서 돈을 들고 도망가는 수법을 가르친다.
시기꾼 맥스는 이렇게 훈련시킨 다른 여인을 이혼한 톰의 아버지까지 유혹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사기꾼 맥스의 동업자인 두 여인을 톰은 연인으로, 새엄마로 두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랑 사기꾼에게 작업당한 톰의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을 새엄마에게 상속하게 됨으로써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하지만 산드라가 톰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이 모든 것을 바로 잡아가기 시작한다.
엠비씨제작사의 김흥도 감독은 이성을 아주 좋아하는 후배를 안다고 한다. 그는 여자와 키스하는 중에도 상대방 어깨너머로 다른 여자를 물색하는가 하면, 커피숍에서 회의를 진행하면서도 지나가는 얼핏 예뻐보이는 여자가 있으면 쭈르륵 달려나가 확인한 후 말을 건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항시 앉을 때 거리를 볼 수 있는 쪽으로 앉는다.
하지만 최근에 자신에게 헌신적인 여인을 만난 후 정이 들었다며 예전의 기행을 멈추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는 정든 여인이 더욱 사랑스러워 보인다고 자랑한다.
정이 들었다는 것은 그 사람 기억속으로 스며들어 그 사람 인생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것이 시간의 가치이고 그래서 정은 위대하다. 그 어떤 첫인상보다도 말이다.
김흥도 감독은 간단한 예를 말해준다. 우리가 여동생보다 외모가 예쁜 여자가 있다고 해서 여동생을 바꾸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기억이 인생이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사랑은 정이 된다.
사랑의 슬픔도 희석되고 더 지나면 그것 역시 정의 다른 모습인 추억이라고 불리게 된다. 늘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누군가에게 정든 사람으로 기억되려면
그 이전단계로써 사랑을 많이 주어야 한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