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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기술 패권 경쟁서 뒤처진 유럽, 경제 성장 '빨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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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기술 패권 경쟁서 뒤처진 유럽, 경제 성장 '빨간불'

유니콘·거대 기술기업 배출 못해…미국·중국과 모든 지표에서 격차
투자 부족·시장 분열에 발목…경제 성장까지 '경고등'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미국과 중국에 뒤처진 유럽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비상장 신생기업)을 배출하지 못하고 투자가 부진하면서, 미국·중국과의 핵심 지표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미국과 중국에 뒤처진 유럽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비상장 신생기업)을 배출하지 못하고 투자가 부진하면서, 미국·중국과의 핵심 지표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사진=로이터
미국이 경제 성장 면에서 유럽을 크게 앞지르는 가운데, 유럽이 국제 기술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분석이 나왔다. 소프트웨어부터 인공지능(AI)까지 차세대 기술 기업 육성에 실패하면서 경제 성장까지 발목을 잡는다는 지적이다. 유럽 대륙에서 애플, 메타, 구글 같은 거대 정보기술(IT) 기업이 나오지 못하는 현실이 핵심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일(현지시각) 기사에서 유럽이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는 현실을 다양한 자료와 차트를 통해 조명했다.

◇ 유니콘·거대기업 부재…'혁신 사막화' 심각


우선 유럽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비상장 신생 기업) 육성부터 미국과 중국에 현저히 뒤처진다. 유니콘은 자본주의 혁신의 척도로, 새로운 사업 방식으로 기존 산업에 도전하는 고성장 기업을 뜻한다. 최신 자료를 보면(2025년 4월 기준), 유니콘 기업 수는 미국이 702개(총 기업가치 약 3조2000억 달러)로 압도적인 반면, 중국은 300개 이상(약 1조4000억 달러), 유럽 전체(영국 104개, 프랑스 34개, 독일 29개 등 포함)는 600여 개에 이르지만 총 기업가치는 약 3300억~4000억 달러 수준으로 미국과 중국에 크게 못 미친다. 스트라이프(Stripe)는 더블린과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두고 가치가 양쪽에 분할 집계된 사례도 있지만, 전체 열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다.

설상가상으로 유럽에서 탄생한 유니콘조차 기업공개(IPO)를 통해 각 산업의 주도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슬론 경영대학원의 앤드루 매카피 교수가 분석한 자료를 보면, 창업 50년 미만이면서 기업가치 100억 달러 이상인 상장 기업 수는 미국이 241개(총 가치 약 29조6000억 달러)인 데 반해, 유럽연합(EU)은 고작 14개(총 가치 4300억 달러)에 불과했다. 미국의 경우 메타 플랫폼스, 알파벳, 아마존, 애플, 엔비디아, 오라클 등이 대표 사례이다.

◇ 투자·연구개발 '빨간불'…생산성까지 추락


배경에는 고질적인 투자 부족이 자리한다. 실제로 유럽의 벤처 투자(VC) 규모는 미국 대비 20% 수준에 그치며, 2014년부터 2024년까지 10년간 유럽 기술 분야에 총 4250억 달러가 투자됐으나 이는 여전히 미국과 큰 격차를 보인다.

혁신의 동력이 되는 연구개발(R&D) 투자 역시 부진하다. 유럽 정부의 한 사람 기준 연구개발 투자는 미국과 비슷하지만 민간 자본 유입이 현저히 적다. 특히 과도한 규제, 성장 한계, 그리고 30여 개국에 걸친 언어·법률·관습 차이에서 오는 시장 분열은 신생 기업이 빠르게 규모를 키우는 것을 막고 상장과 국제화를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2007년부터 2020년까지 연구개발 투자액 추이를 보면 미국이 최상위를 유지하는 가운데 중국이 빠르게 일본과 유럽연합을 추월하며 격차를 벌렸다.

혁신과 신기술 기업의 부재는 노동 생산성 하락으로도 이어진다. 디지털 경제가 막 시작되던 1990년대 후반, 유럽연합 노동자의 시간당 평균 생산성은 미국 노동자의 95%에 달했으나, 현재는 80% 미만으로 주저앉았다. 미국에 비해 노동시간도 짧아 경제 성장에는 부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5년부터 2020년까지 관련 지표 변화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국과 미국 사이 생산성 격차가 커지거나 유럽의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흐름을 보여준다.

◇ 유럽 기술 부진의 6가지 '족쇄'


월스트리트저널과 여러 분석가는 유럽이 이처럼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는 뿌리 깊은 원인으로 시장 분열, 투자 부족, 취약한 혁신 생태계, 그리고 문화 차이 등을 복합적으로 지목한다.

첫째, 과도한 규제와 관료주의다. 유럽연합의 개인정보보호법(GDPR), 디지털시장법(DMA), 디지털서비스법(DSA) 같은 강력한 규제는 미국 대기업에는 대응력을 키워주는 반면, 유럽 안 신생 기업과 성장기업에는 비용 부담과 진입장벽을 높여 혁신을 막는 결과를 낳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둘째, 벤처 투자와 자본시장 규모 부족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유럽은 미국에 비해 벤처 투자 규모가 현저히 작을 뿐 아니라, 자본시장 자체도 덜 발달했다. 유럽 가계 자산의 31%가 현금과 예금에 묶여있는 반면, 미국은 이 비율이 12%에 불과해 비교적 주식·채권 같은 성장 자본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다. 이 때문에 유럽 신생 기업들은 성장 단계에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미국 등지로 옮겨가는 사례도 잦다.

셋째, 시장 분열과 확장 한계다. 30개 넘는 국가, 다양한 언어·법률·관습이 공존하는 유럽 시장의 분열은 기업의 확장을 가로막는 고질 문제다. 미국 기업이 거대한 단일 내수 시장을 발판 삼아 빠르게 규모를 키우는 것과 대조된다.

넷째, 보수 성향 투자와 위험 회피 문화를 꼽는다. 유럽 투자자와 기업가들은 미국에 비해 다른 이들보다 위험 감수를 꺼리며, 실패에 대한 사회 부담도 크다는 분석이다. '성장 우선, 수익은 나중' 전략으로 시장 선점을 노리는 미국 기업들과 달리, 유럽은 초기부터 수익과 안정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 대담한 혁신이 나오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전문가들을 인용, "장시간 노동과 과감한 위험 감수보다는 안정, 고용 보장, 삶의 질을 중시하는 문화 요인이 부분 원인"이라고 보도했다.

다섯째, 인재 유출과 신생 기업의 투자금 회수 문제다. 유럽의 우수 인재와 유망 신생 기업이 더 나은 자금 지원, 사업 환경, 성장 기회를 찾아 미국 등으로 떠나는 '인재 유출' 현상도 심각하다. 스카이프(Skype), 딥마인드(DeepMind)처럼 유럽에서 출발했지만 끝내 미국 대기업에 인수된 사례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여섯째, 혁신 생태계와 관계망 미흡이다. 미국 실리콘밸리 같은 대규모 혁신 중심지가 없고, 성공한 창업가와 투자자 사이 관계망이 다른 곳에 비해 약해 '연쇄 창업'이나 대형 투자금 회수 사례가 미국, 이스라엘, 중국에 비해 드물다.

유럽의 기술 경쟁력 부진은 단기간에 개선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파격 경제 정책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에도, 미국이 유럽과의 기술 격차를 더욱 벌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유럽은 국제 기술 산업의 여러 핵심 지표에서 미국, 중국에 뒤처지는 모습이다. 유니콘 창출, 대형 상장 기술기업 배출, 민간 투자 유치, 혁신 역량, 노동 생산성 등이 모두 그렇다. 이 때문에 유럽 전체의 경제 성장률은 둔화하고 미국과의 격차는 한층 벌어지는 양상이다. 단기간에 구조적인 변화가 없다면 이 흐름은 지속될 공산이 크다.

유럽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미래 기술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혁신 생태계 강화, 과감한 규제 완화, 투자 확대, 실제 단일 시장 활성화, 핵심 인재 유치와 보유를 위한 범유럽 차원의 전략 대응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명목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유럽연합 경제 규모는 이미 미국보다 3분의 1가량 작으며, 지난 수년간 성장률 역시 미국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은 위기감을 더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