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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일, 러시아 위협에 20년간 방치한 '지하 요새' 재건 총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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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독일, 러시아 위협에 20년간 방치한 '지하 요새' 재건 총력

냉전 후 2000여 곳→580곳 급감, 인구 0.5%만 수용 가능한 '민낯'
지하철·주차장 등 기존 공간 활용…'생활밀착형 대피소'로 전환 서둘러
독일 뮌헨의 운게러슈트라세 158번지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로 개조된 방공호 앞을 자동차들이 빗물이 젖은 도로를 따라 지나가고 있다. 독일은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고조되자, 20년 만에 방공호 재건에 나섰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독일 뮌헨의 운게러슈트라세 158번지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로 개조된 방공호 앞을 자동차들이 빗물이 젖은 도로를 따라 지나가고 있다. 독일은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고조되자, 20년 만에 방공호 재건에 나섰다. 사진=로이터
과거 군사 공격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방공호를 폐쇄했던 독일이 20년 만에 결정을 뒤집고 '지하 요새' 재건에 나섰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 20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실제로 냉전 시절 2000여 곳에 이른 독일의 공공 방공호는 현재 580곳만 남아 인구의 0.5%인 48만 명을 수용하는 데 그친다.

반면, 핀란드는 5만 곳의 방공호가 전체 인구의 85%인 48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마저도 서류상 수치일 뿐, 실제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오랜 평화에 안주해 대다수 방공호를 해체하거나 미술관, 호텔 등 다른 용도로 바꿔왔기 때문이다. 독일 시민방호청(BBK)은 "남은 시설 상당수가 실제 대피소로 쓰기엔 부적합하다"고 진단했다. 정부 대변인 역시 "민방위 장비의 유지보수가 중단된 상태"라며 베를린의 주요 시설마저 "기능적으로나 운영적으로 제 역할을 못 한다"고 실토했다.

러시아가 수년 안에 서유럽을 공격할 태세를 갖출 수 있다는 군사 전문가들의 경고 속에서, 우크라이나처럼 도시 폭격이 일상화하는 분쟁이 생기면 수백만 독일 민간인이 무방비로 놓일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이에 독일 당국은 상황을 바로잡고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029년까지 '전시 대비 태세(war-ready)'를 갖추겠다는 국가 목표 아래 민간인 보호 체계 완비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2024년에 수립된 기밀문서 '독일 작전 계획'은 전쟁이 터졌을 때 독일이 수십만 명의 나토(NATO) 병력을 위한 집결지 구실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계획에는 군용 차량이 다닐 도로와 교량, 핵심 기반 시설 보호, 계속되는 공격 속에서 정부와 경제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담겨 있다.

◇ 거대 벙커 대신 '생활밀착형 분산 대피소'로


벙커는 이 계획의 핵심 요소다. 뮌헨 연방군 대학교 위험연구센터장 노르베르트 게베켄은 "정부는 무엇을 위협으로 볼지, 그리고 그 위협에서 무엇을 보호해야 할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며 "두 질문 모두 아직 답이 나오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기존 대형 지하 방공호를 새로 짓는 일은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기에, 지하 주차장, 지하철역, 건물 지하실 같은 기존 공간을 신속히 보강해 대피소로 쓰는 분산형 방공 시스템 구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26년 말까지 100만 명이 대피할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1차 목표다. 독일 내무부, 연방 시민보호·재난지원청, 연방정부 부동산청이 힘을 합쳐 기존 건물을 대피소로 바꾸기 위한 구체적인 사양을 마련하고 있으며, 시민이 자기 지하실이나 차고를 대피소로 보강하도록 권고한다. 정부는 또 민간인에게 가장 가까운 대피소를 알려주는 긴급 대피 안내 앱과 공간 검색 디지털 지도 시스템 도입을 추진한다.

◇ 천문학적 예산, 유럽 전역으로 번지는 '방공 태세 강화'


물론 해결할 과제도 많다. 기존 방공망을 전면 보수하고 새로 확보하는 데 단일 사업으로만 400억~800억 유로(약 64조 7336억~129조 4672억 원), 앞으로 10년간 추가로 300억 유로(약 48조 5502억 원) 이상이 필요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막대한 예산 부담 탓에 새로 짓는 것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워, 기존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사이렌망, 긴급경보망 같은 비상 대응 체계를 함께 보강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민간에서도 변화가 일고 있다. 방공호 전문 건설업체 DSZ의 페터 아우른함머 대표는 "이 주제는 오랫동안 농담거리였다"면서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 미국과 관계 변화, 독일 재무장으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며 지하실을 개인 벙커로 바꾸려는 문의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움직임은 독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핀란드와 폴란드, 발트 3국처럼 러시아와 가까운 다른 유럽 국가들 역시 비슷한 대응에 나서고 있다. 튼튼한 민방위 체계를 갖추는 일은 단순히 인명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전쟁 자체를 억제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브란덴부르크 사회안보 연구소장 팀 슈투히는 이러한 노력이 갖는 전략적 의미를 강조했다. "우리가 러시아의 침략이라는 도전에 맞설 능력과 의지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억지력을 높여, 러시아를 향해 '넘볼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는 셈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