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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단극은 끝났지만, 충돌선은 아직 봉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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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단극은 끝났지만, 충돌선은 아직 봉합되지 않았다

트럼프 2기 국가안보전략과 키신저식 세력균형 간 차이로 본 나토 동진 중단의 미결단이 인도태평양 동맹 신뢰를 갉아먹는 구조와, 그리고 독자 핵무장에 의한 자력 억지 통해 미의 동아시아 질서 전략 뒷받침하는 한 축이 되는 한국의 전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0월30일 부산 공군 제5공중기동비행단 내 나래마루에서 미·중 정상회담을 마친 뒤 회담장을 나서며 대화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0월30일 부산 공군 제5공중기동비행단 내 나래마루에서 미·중 정상회담을 마친 뒤 회담장을 나서며 대화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단극 이후의 세계를 말하면서 단극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미국


미 지정학자인 브랜던 J. 와이커트가 지난 12월29일 외교안보 전문 매체인 내셔널 인터레스트(The National Interest)에 게재한 '단극(unipolar)의 순간은 끝났다. 그런데도 미국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라는 제하의 아티클을 통해 제기한 문제의식은 명료하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누려온 단극, 즉 유일한 패권국의 지위는 이미 끝났지만, 워싱턴의 전략적 사고는 여전히 그 시절의 관성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미국이 세계 질서를 관리하는 국가가 아니라 설계하는 국가였다는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동 아티클의 요지다. 이 같은 인식의 지체는 단순한 학술적 논쟁이 아니라, 전쟁과 동맹의 신뢰를 좌우하는 현실의 문제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새 국가안보전략(NSS)은 이 점을 인식하고 자유주의 패권에서 현실주의적 세력균형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가치 확산과 규범 강요 대신 국익의 집중, 비용 관리, 선택과 집중을 전면에 내세웠다. 선언만 놓고 보면 시대 인식은 분명히 바뀌었다. 그러나 전략은 선언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구조를 바꾸지 못한 선언은 오히려 불확실성을 키운다.

선언과 운용의 괴리가 만들어내는 전략적 모호성


그러나 트럼프 2기의 NSS는 ‘비개입 성향의 현실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제 운용에서는 동맹에 대한 관세 압박과 대미 투자 강요라는 강경한 경제 레버리지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동맹을 세력균형의 축으로 대우하기보다는 미국 국력 보전의 수단으로 다루는 인상을 강화한다. 동맹의 관점에서 이는 방위 공약의 신뢰 문제로 직결된다.

이 모순은 유럽 전선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지만, 동시에 그 전쟁이 어떤 구조적 조건 속에서 발생했는지를 외면한 채 재발을 막을 수는 없다. 그 핵심에는 나토의 동진 문제가 있다. 러시아가 반복적으로 경고해 온 핵심 안보선, 즉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문제에 대해 미국은 지금까지 명시적 중단을 선언하지 않았다. 현실주의적 세력균형이 요구하는 ‘상대의 핵심 이익선 인정’이라는 문턱을 끝내 넘지 못한 것이다.

나토 동진 노선 폐기의 미결단이 남긴 것


나토 동진의 문제는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이 충돌선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대한 시험대다. 충돌선을 봉합하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만 강화하면, 억지는 억제가 아니라 자극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의 침공은 바로 이 구조적 실패의 결과였다.

더 중요한 점은, 이 미결단이 동맹 전체에 전달하는 신호다. 미국이 상대 강대국의 핵심 이익선을 명확히 설정하지 못하고, 모호성을 유지하는 순간, 동맹국들은 두 가지 상반된 메시지를 동시에 받는다. 하나는 “미국은 현실주의로 전환했다”는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충돌의 근본 원인은 여전히 봉합되지 않았다”는 현실이다. 이 간극이 동맹 신뢰를 갉아먹는다.

키신저식 세력균형과의 결정적 차이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의 세력균형이 오늘날 다시 거론되는 이유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키신저의 접근은 도덕적 평가 이전에 충돌을 관리하는 기술이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상대의 체제와 핵심 안보선을 승인하지 않으면 안정도 없다는 냉혹한 전제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소련과의 데탕트, 중국과의 화해는 모두 이 원칙 위에서 가능했다.

트럼프 2기 NSS는 자유주의 패권의 부담을 인식하고 탈피하겠다고 선언했지만, 키신저가 보여준 수준의 결단에는 이르지 못했다. 러시아가 자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국가들을 나토에 가입시켜 미군을 주둔시키려 한다고 우려하는 나토 동진의 정치적 종료, 충돌선의 명확한 설정, 동맹의 전략적 자율성 인정이라는 요소가 빠진 세력균형은 미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미완은 유럽에서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도태평양으로 전이된다.

유럽의 미봉책이 인도태평양에 남기는 흔적


동맹은 지역별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이 유럽에서 충돌선을 봉합하지 못하고 모호성을 유지할 때, 인도태평양 동맹국들은 이를 하나의 패턴으로 인식한다. “미국은 전쟁을 피하려 하지만, 근본 원인을 제거할 정치적 결단에는 주저한다”는 인식이다.

이 인식은 억지의 신뢰성을 약화시킨다. 억지는 의지와 능력이 동시에 인식될 때만 작동한다. 유럽에서 의지의 한계가 노출되면, 인도태평양에서도 동일한 의문이 제기된다. 특히 핵을 보유한 상대와 직접 마주한 동맹국일수록 이 의문은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다.

삼극 이행기의 위험성


와이커트가 지적했듯, 현재의 세계는 단순한 다극이 아니라 미국, 중국, 러시아가 서로를 제약하는 삼극 이행기다. 이 시기는 가장 불안정하다. 강대국들은 자신의 주변부를 정리하려 하고, 충돌선은 더욱 선명해진다. 이 과정에서 동맹국들은 자동적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협상과 조정의 변수로 취급될 위험에 노출된다.

유럽에서 우크라이나가 그랬듯, 인도태평양에서는 대만과 한반도가 그 변수의 위치에 서 있다. 이 구조를 인식하지 못한 채 선언적 동맹에 안주하는 것은 전략적 착각이다.

인도태평양에서 요구되는 ‘더 많은 역할’


트럼프 2기 NSS는 인도태평양에서 동맹의 역할 확대를 명시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떠난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모든 부담을 혼자 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동맹이 억지의 일부를 실질적으로 분담해야 한다는 요구다. 이 요구는 현실주의적이지만, 동시에 동맹의 선택을 강제한다.

문제는 동맹이 분담해야 할 ‘역할’이 어디까지인가다. 재래식 전력 증강만으로 핵 위협을 억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답은 점점 불명확해지고 있다.

한국이 마주한 구조적 질문


한국은 이 전환의 최전선에 있다. 북한은 이미 핵보유국이며, 중국과 러시아는 전략적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일본은 군사 정상화의 문턱을 넘어섰다. 이 모든 변화 속에서 미국은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이 환경에서 한국의 억지는 더 이상 선언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유럽에서 드러난 나토 동진의 미결단은, 미국이 충돌선을 명확히 봉합하지 못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이 선례는 인도태평양 동맹의 심리적 기반을 약화시킨다.

확장억지의 조건 변화


확장억지는 자동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의 의지, 능력, 그리고 동맹국의 자율적 대응 능력이 결합될 때만 신뢰성을 갖는다. 유럽 전쟁은 외부 지원만으로 국가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 교훈은 한반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이 스스로 억지의 일부를 책임지지 않는다면, 협상의 테이블에서 한국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 이는 동맹의 약화가 아니라, 동맹의 재설계 문제다.

자력 억지로 수렴되는 선택지


다극, 혹은 삼극 이행기의 억지는 결국 자력에 의한 억지로 수렴한다. 그리고 현대 국제정치에서 결정적 억지의 중심은 핵이다. 이 결론은 이념이 아니라 구조에서 나온다.

다만 중요한 것은 방식이다. 한국의 자력 억지는 동맹 파괴가 아니라 동맹 강화의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미국을 대체하려는 핵무장이 아니라,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억지 구조로서의 독자 핵무장이어야 한다.

나토의 교훈, 한반도의 설계


유럽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핵은 나토를 붕괴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나토 내부의 균형축으로 작동했다. 이 사례는 동맹 내 자율적 억지가 반드시 동맹 약화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의 독자 핵무장도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질서 안정을 위한 미국의 전략을 뒷받침하는 한 축이 될 수 있다. 한국 역시 동맹과의 작전·정보·정치적 일체성을 유지한 채, 자력 억지를 단계적으로 구축하는 경로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억지의 신뢰성을 높이는 선택이다.

미완의 미국 전략을 활용하는 법


트럼프 2기 NSS는 완결된 세력균형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미완의 공간이 협상의 여지를 만든다. 한국의 전략은 이 미완을 비판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그 미완을 메우는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동맹의 필수 축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유럽에서 봉합되지 못한 충돌선의 교훈을 인도태평양에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국은 독자 핵무장을 중심으로 한 자력 억지를 통해 억지의 공백을 선제적으로 메워야 한다.

봉합되지 않은 충돌선의 시대


단극은 끝났지만, 충돌선은 아직 봉합되지 않았다. 나토 동진의 미결단은 유럽의 전쟁을 넘어, 인도태평양 동맹 신뢰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이 시대에 살아남는 국가는 선언을 믿는 국가가 아니라, 구조를 설계하는 국가다.

한국의 선택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동맹을 유지하되, 독자 핵무장을 중심으로 한 자력 억지를 통해 그 동맹을 작동 가능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다극 시대 한국 대전략의 출발점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