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수비대 18만 분산 게릴라전·외교 채널 단절·협상 키맨 사망… 유가 140달러 경고에 정부 비축유 2246만 배럴 방출 준비
이미지 확대보기파이낸셜타임스(FT)는 19일(현지시간) 이란 정권 내부 소식통과 외교 전문가를 인용해 이란이 ▲경제 제재 전면 해제 ▲미국 철군 ▲이스라엘의 재공격 중단 확약을 종전의 선결 조건으로 내걸고,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1년 이상의 장기 소모전도 감수하겠다는 태세라고 보도했다. 지난달 28일 미국·이스라엘 연합군이 이란 전역을 대규모 타격한 이후 교전은 3주째 계속되고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5개월 뒤 또 터지는 휴전은 없다"… 이란이 내건 종전 7대 조건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 의장은 국영 방송에서 "5개월 뒤에 다시 전쟁이 터지는 휴전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공언했다. 이란이 하마스-이스라엘 간 일시 교전 중단 모델을 명시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이란이 제시한 종전 조건은 크게 두 층위로 나뉜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지난 12일 SNS를 통해 공개한 외교적 요구는 ①이란의 주권적 권리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식 인정 ②전쟁 피해 배상 ③미국·이스라엘의 재공격 금지 보장이다. 이란 국영 타스님 통신은 16일 호르무즈 해제의 전제 조건으로 ④제재 해제 보장 ⑤이란 주변 미군 기지 폐쇄 ⑥동결 자산 전액 해제 ⑦달러 외 통화 결제 확대를 추가로 제시했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채텀하우스) 중동 전문가 사남 바킬은 "이란 정권이 경제 제재 해제와 재공격 방지 보장을 받지 못한다면 전쟁을 멈출 내부 동인(動因)이 없다"고 분석했다.
'90% 파괴' 주장 불구 미사일 500발·드론 2000대 발사 지속
미국 국방부와 이스라엘 당국은 이란 내 1만 6000여 곳을 타격해 미사일 역량의 90% 이상을 무력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18만 명은 기지를 버리고 지하 시설과 민간 밀집 지역으로 분산해 게릴라식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이란은 지난 3일부터 '분산형 모자이크 방어 지침(DMD)'을 발동해 전국 31개 주 지방 사령부에 상부 지시 없이 독자 작전권을 부여했다.
이란 군사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이후 탄도미사일·해상 미사일 500발 이상과 드론 약 2000대를 발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란 측 인사는 "지하 비밀 시설에서 미사일과 발사대를 계속 생산하면서 장기전을 위해 발사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며 "두바이를 마비시키는 데 한 달에 미사일 한 발이면 충분하다"고 말한 것으로 FT는 전했다.
협상 가교 라리자니 사망… 외교 채널 사실상 '단전'
종전의 물꼬를 터야 할 외교 경로는 가동을 멈췄다. 이란 외무장관은 미국 특사와 접촉했다는 외신 보도를 "에너지 시장을 안심시키려는 망상"이라고 일축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이란 특사 스티브 위트코프는 CNBC 인터뷰에서 전쟁 종결 방법을 묻는 질문에 "나도 모른다"고 답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17일 이스라엘의 타격으로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 사무총장 알리 라리자니가 사망했다. 이란 내 대표적 온건 실용주의자로 꼽히던 그의 부재는 협상 추진력 자체를 크게 약화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 역내 외교관은 "이란은 미국이 물러서더라도 이를 '체제의 승리'로 선전하면서, 호르무즈 해협에서 통과 선박을 선별 허용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봉쇄가 '위협'에서 '현실'로 바뀐 순간… 유가 140달러 경고
시장이 가장 주목하는 변수는 이란이 호르무즈 봉쇄의 '실전 효과'를 이미 체감했다는 사실이다. 서방 당국 관계자는 "이란은 그동안 해협 봉쇄를 협박 카드로만 활용해왔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자 그 파급력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했다"고 지적했다.
국제유가(브렌트유 기준)는 전쟁 발발 전 배럴당 65달러(약 9만 7000원) 수준에서 100달러(약 15만 원)를 넘어섰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향후 두 달 이상 배럴당 95달러(약 14만 2000원)를 웃돌 것으로 전망했다. 악시오스(Axios)는 봉쇄가 장기화할 경우 140달러(약 20만 9900원)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원유 70% '호르무즈 의존'…'4월 수급 절벽' 현실화 우려
대한민국은 이번 사태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총 원유 수입량 1억 3700만 톤 중 69.6%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UAE)·이라크·쿠웨이트·카타르산이다. 액화천연가스(LNG)도 중동 비중이 15~20%에 달한다.
에너지 업계에 따르면, 호르무즈 봉쇄 이전 마지막으로 출항한 초대형 유조선(VLCC)이 20일 새벽 국내 항구에 입항할 예정이다. 24일에는 대체 항로를 이용한 유조선이 추가 입항하지만, 물량은 봉쇄 이전에 비해 크게 부족해 4월 수급 차질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정부는 UAE 호르무즈 외곽의 푸자이라 항구를 통한 원유 도입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곳도 이란의 미사일 사거리 안에 있어 실제 선적 가능 시점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정부 비상 대응… 비축유 2246만 배럴 방출·100조 원 시장 안정 프로그램 준비
산업통상자원부는 18일 원유 자원안보 위기경보를 '관심'에서 '주의'로 한 단계 격상했다. 지난해 위기경보 제도 도입 이후 첫 상향 조정이다. 정부는 국제에너지기구(IEA)와 공조해 한국에 배분된 2246만 배럴 규모의 비축유 방출을 조율 중이며, 기획재정부는 필요시 100조 원 규모의 시장 안정화 프로그램을 가동할 방침이다.
한국무역협회는 "유가가 10% 오를 경우 국내 수출은 0.39% 감소하는 반면 수입은 2.68% 증가해 무역수지가 급격히 악화한다"고 분석했다. 영국 캐피털이코노믹스는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까지 오르면 전 세계 평균 물가상승률을 0.6~0.7%포인트 추가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란의 '버티기'가 가능한 구조적 이유
이란의 장기전 구상이 단순한 허세가 아닌 이유는 내부 구조에 있다. IRGC는 정규군이 아니라 최고지도자 직속 별도 예산과 경제 네트워크를 운영하는 독립 조직이다. 이란 경제의 30~40%를 장악한 IRGC는 서방의 경제 제재를 우회하는 지하경제 루트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즉, 이란 정권이 단기간에 경제적 질식을 당해 협상장으로 나올 가능성은 낮다는 뜻이다.
반면 서방 진영의 압박 카드도 제한적이다. 이미 대부분의 금융 제재가 가해진 상태에서 '추가 제재'의 실질 효과는 미미하다. 2015년 이란 핵합의(JCPOA)를 이끌어낸 외교 방정식, 곧 이란이 원하는 것(제재 해제)과 서방이 원하는 것(핵 포기)의 교환은 지금의 전면전 국면에서는 작동하기 어렵다.
변수는 이란 민심과 내부 균열
전쟁의 향방을 가를 또 다른 변수는 이란 내부의 균열 가능성이다. 서방의 한 당국 관계자는 "이란 국민들이 현재는 외부 공격 앞에 침묵하고 있지만, 전력·수도 등 핵심 기반 시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정권 내부의 균열도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이란 내 인터넷 차단 및 정전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민심 이반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지금 당장 협상 테이블이 마련될 가능성은 낮다. 협상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해온 라리자니가 사망한 데다, 미국 특사 본인조차 "종전 방법을 모른다"고 시인한 상황이다.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세계 에너지의 목줄을 쥔 이란과, '조건 없는 굴복'을 밀어붙이는 미국·이스라엘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한, 한국을 비롯한 원유 수입국의 공급망 불안은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 2026년 봄, 에너지 위기의 시계는 멈추지 않고 있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