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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패러다임 대전환] '클수록 더 빨리 충전'… 상식 뒤집은 세계 첫 양자 배터리 시제품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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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패러다임 대전환] '클수록 더 빨리 충전'… 상식 뒤집은 세계 첫 양자 배터리 시제품 등장

호주 공동연구진, 레이저 무선충전 방식으로 '집단 충전 효과' 세계 최초 실증
나노초 저장 한계 등 난제 남아… 전기차·양자컴퓨터 상용화까지는 "긴 여정"
배터리 용량을 키우면 충전 시간도 늘어난다. 수십 년 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이 명제가 2026년 들어 정면으로 도전받고 있다. 호주 멜버른대학교·RMIT대학교·국립과학기구(CSIRO) 공동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양자 배터리(Quantum Battery)' 시제품의 충·방전 기능을 동시에 구현하는 데 성공하면서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배터리 용량을 키우면 충전 시간도 늘어난다. 수십 년 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이 명제가 2026년 들어 정면으로 도전받고 있다. 호주 멜버른대학교·RMIT대학교·국립과학기구(CSIRO) 공동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양자 배터리(Quantum Battery)' 시제품의 충·방전 기능을 동시에 구현하는 데 성공하면서다. 이미지=제미나이3
배터리 용량을 키우면 충전 시간도 늘어난다. 수십 년 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이 명제가 2026년 들어 정면으로 도전받고 있다. 호주 멜버른대학교·RMIT대학교·국립과학기구(CSIRO) 공동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양자 배터리(Quantum Battery)' 시제품의 충·방전 기능을 동시에 구현하는 데 성공하면서다. 이번 연구 성과는 19(현지시간) IT 전문매체 인터레스팅 엔지니어링(Interesting Engineering)을 통해 공개됐다.

빛을 가두는 마이크로캐비티 구조… 레이저로 무선 충전


연구진이 설계한 양자 배터리의 핵심은 '유기 마이크로캐비티(Organic Microcavity·미세공진기)'. 빛을 특정 공간에 가두는 여러 층의 유기물 박막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외부에서 레이저를 쏘아 에너지를 무선으로 공급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연구진은 첨단 분광 기술로 충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양자 역학적 특성을 직접 관측하고 데이터로 확인했다.

기존 배터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에너지를 저장하는 방식이다. 리튬이온 배터리 등 화학 전지는 전기화학 반응으로 이온을 이동시켜 에너지를 축적하지만, 양자 배터리는 양자 역학적 '중첩(superposition)''얽힘(entanglement)' 현상을 에너지 저장에 직접 활용한다.

'집단 충전 효과'N개 단위 묶으면 충전 시간 √N분의 1로 단축

이번 연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발견은 이른바 '집단 효과(Collective Effects)'. 배터리 내부에 N개의 에너지 저장 단위(Unit)가 있다고 가정할 때, 각 단위를 개별적으로 충전하면 소요 시간이 N에 비례해 늘어난다. 그러나 양자 배터리는 모든 단위가 얽힘 상태로 에너지를 동시에 받아들이기 때문에 충전 시간이 1/N 배로 줄어든다.

수치로 환산하면 차이는 더욱 선명하다. 단위 하나를 충전하는 데 1초가 걸린다면, 100개 단위가 결합한 양자 배터리의 충전 시간은 0.1초에 불과하다. 용량을 10배 키워도 충전 시간은 오히려 10분의 1로 줄어드는 셈이다. 리튬이온 배터리의 고질적 병목, '대용량=장시간 충전'이라는 등식을 수학적으로 깨는 구조다.

에너지 저장 원리의 이 근본적 차이가 향후 배터리 산업의 판도를 흔들 잠재적 변수로 꼽힌다. 국내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아직 초기 기초 연구 단계여서 상용화를 논하기는 이르지만, 집단 충전 효과가 실험실 밖에서도 재현된다면 차세대 배터리 설계 방향 자체를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CSIRO 콰치 박사의 8년 여정… 이번에 '방전'까지 완성


CSIRO의 제임스 콰치(James Quach) 박사는 2018년부터 양자 배터리 이론을 정립해 왔다. 2022년에는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1세대 시제품을 선보였으나, 당시에는 저장한 에너지를 다시 꺼내 쓰는 '방전'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 이번 신형 시제품은 방전 기능까지 갖춰 배터리로서의 기본 사이클인 충전→저장→방전을 모두 구현했다.

콰치 박사는 공식 보도자료에서 "이번 시제품은 상온에서 빠른 충전과 에너지 저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기초 토대"라며 "앞으로 시제품의 규모를 키우고 저장 지속 시간을 늘리는 실증 연구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나노초 저장'의 벽… 스마트폰 구동도 어려운 용량은 과제


그러나 상용화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현재 시제품이 저장할 수 있는 에너지는 수십억 전자볼트(eV) 수준에 그친다. 최신 스마트폰 한 대를 잠깐 켜는 데도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더욱 치명적인 약점은 저장 지속 시간이다. 충전된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몇 나노초(10억 분의 1)에 불과해, 아무리 빠르게 에너지를 채워도 활용하기 전에 소멸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시장 전문가들은 양자적 충전 속도와 기존 화학 전지의 저장 내구성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아키텍처가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반도체 업계에서는 극자외선(EUV) 노광 공정이 등장했을 때도 기존 공정과의 병용 단계를 수년간 거친 뒤 주력 기술로 정착한 선례가 있다. 배터리 기술 전환 역시 비슷한 경로를 밟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전기차 5분 충전·양자컴퓨터 전원… 두 시장이 첫 무대 될 전망


양자 배터리가 현실화할 경우 가장 먼저 수혜를 볼 분야는 전기차와 양자컴퓨터다. 콰치 박사는 "내연기관차에 기름을 넣는 것보다 빠르게 전기차를 충전하고, 먼 거리에서도 무선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강조했다.

학계에서는 양자 배터리가 전기차보다 양자컴퓨터의 전원 공급 장치로 먼저 실용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양자컴퓨터는 절대영도(-273.15, 0켈빈)에 가까운 극저온에서 작동하는데, 이 환경에서 열 손실 없이 초정밀 에너지를 즉각 공급할 수 있는 양자 배터리의 특성이 구조적으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삼성전자·LG전자 등이 양자컴퓨팅 기술 투자를 본격화하고 있어, 관련 전원 장치 기술의 향방에 관심이 쏠린다.

이번 호주 연구진의 성과가 한국 배터리 산업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시점은 아직 멀다. 그러나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가 차세대 기술로 전고체(全固體) 배터리에 집중하는 사이, 글로벌 학계는 한 단계 더 앞선 '양자 배터리'의 가능성을 실험실에서 입증하기 시작했다. 기초 연구의 도약이 상용화로 이어지기까지는 통상 10~20년의 시차가 존재하지만, '첫 단추'가 어디서 꿰어지는지는 미래 산업 주도권을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이번 시제품은 양자 배터리가 물리 법칙 안에서 실현 가능한 기술임을 확인한 것으로, 기초과학 투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사례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