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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토큰화 금융, 위기 속도 증폭"…블록체인 결제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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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토큰화 금융, 위기 속도 증폭"…블록체인 결제의 역설

즉시·24시간 결제가 규제 개입 시간 없애…2008년 금융위기와 다른 구조적 위험
블랙록·JP모건 등 토큰화 실물자산 올해 66% 급증, 275억 달러 돌파
IMF, CBDC 기반 안전망 구축 촉구…"설계 창문, 닫히기 전에 행동하라“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금융의 '토큰화' 흐름이 금융위기가 터질 때 규제 당국이 손쓸 시간을 앗아가는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미지=제미나아3이미지 확대보기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금융의 '토큰화' 흐름이 금융위기가 터질 때 규제 당국이 손쓸 시간을 앗아가는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미지=제미나아3
국제통화기금(IMF)이 전통 금융 인프라를 블록체인 위에 올려놓는 '토큰화' 흐름에 정면으로 제동을 걸었다. 기술 혁신의 핵심 미덕으로 꼽히던 즉시 결제와 24시간 가동이 오히려 금융위기가 터질 때 규제 당국이 손쓸 시간을 앗아가는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IMF 금융자문관 토비아스 아드리안(Tobias Adrian)은 지난 3일(현지시각) 발표한 보고서 '토큰화 금융(Tokenized Finance)'에서 이 기술을 "금융 구조의 주변적 효율화가 아닌 근본적 재편"으로 규정하며 선제적 정책 대응을 촉구했다. 블룸버그가 4일(현지시각) 이 내용을 주요 기사로 다뤘다.

속도가 방패를 허문다…24시간 결제의 역설


월가에서 토큰화를 향한 발걸음은 이미 달음박질 수준이다. 블랙록(BlackRock)은 토큰화 펀드 'BUIDL'의 운용 자산을 17억 달러(약 2조 5600억 원) 이상으로 키웠고, JP모건체이스(JPMorgan Chase)는 토큰화 예금과 머니마켓펀드(MMF) 상품을 잇달아 내놨다.

나스닥(Nasdaq)은 지난해 9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규제 거래소 안에서 토큰화 주식 거래를 허용해 달라고 신청했으며, 뉴욕증권거래소(NYSE)는 올해 초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토큰화 주식·상장지수펀드(ETF) 24시간 거래 플랫폼 구축 계획을 공개했다.

시장 규모도 가파르게 불었다. 업계 데이터 제공업체 디파이야마(DeFiLlama)에 따르면 공개 블록체인에서 거래되는 토큰화 실물자산(RWA)의 총 가치는 올해 초 대비 66% 뛰어 최근 약 275억 달러(약 41조 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미국 국채·채권·머니마켓펀드를 기초자산으로 한 토큰화 펀드가 44%로 가장 많은 몫을 차지한다.

바로 이 성장 속도 한가운데서 IMF가 경고음을 울렸다. 아드리안 자문관은 보고서에서 "결제 지연은 중앙은행과 규제 당국이 위기 상황에 개입할 시간을 확보해 주는 완충재였다"며 "즉시 결제 시스템에서는 마진콜이 발생하기 전 개입 여지가 거의 사라진다"고 밝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각국 중앙은행이 리먼브러더스 파산 직후 며칠간의 처리 시간을 활용해 긴급 유동성을 투입하고 대형 기관 간 연쇄 파산을 막을 수 있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코드 기반 스마트 계약이 자동으로 마진콜을 집행하는 토큰화 시장에서는 그 며칠이 몇 초로 쪼그라든다.

중앙은행 긴급 대출 제도의 구조적 한계도 도마 위에 올랐다. 보고서는 "중앙은행 긴급 유동성 창구는 업무 시간 중 발생하는 위기를 전제로 설계됐다"고 짚으며,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토큰화 시장에는 현행 체계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스테이블코인, '제2의 머니마켓펀드' 될 수 있다


아드리안 자문관은 토큰화 시장의 결제 수단으로 빠르게 자리 잡는 민간 발행 스테이블코인을 머니마켓펀드에 직접 비유했다. 평상시엔 잘 굴러가지만 시장이 흔들리면 대규모 환매 사태에 취약하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MMF는 2008년 리먼 파산 직후와 2020년 코로나19 충격 때 하루 만에 수백억 달러가 빠져나가며 시스템 불안을 증폭시킨 전례가 있다.

보고서는 토큰화 금융이 나아갈 수 있는 갈림길을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결제 닻으로 삼는 조율된 시스템, 둘째는 각국 플랫폼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파편화하는 경로, 셋째는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공공 안전망이 약해지는 시나리오다.

IMF는 이 세 경로 중 정책 공조가 실패하면 가장 불안정한 세 번째로 흘러갈 개연성이 크다고 봤다.

업계에서는 IMF가 혁신을 막는 것이 아니라 속도 조절을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폴 앳킨스(Paul Atkins) SEC 위원장이 토큰화 기술에 공개 지지 입장을 밝혀온 만큼 미국 시장에서는 규제 완화 기조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나온다.

영국에서는 최근 6개 대형 은행이 토큰화 시범 거래에 참여하는 등 주요국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한국도 법 제도 정비 지연…'뒷북 대응' 우려


국내 상황은 더 촉박하다. 금융위원회가 증권형 토큰 발행(STO) 관련 가이드라인을 내놨지만, 이를 뒷받침할 전자증권법·자본시장법 개정안은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뒤 22대 국회에서 재발의된 상태로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국내 법안 정비가 늦어지는 탓에 토큰화 증권 시장이 본격 궤도에 오르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평가를 내놓은 바 있다. 삼일PwC경영연구원은 2030년 국내 토큰 증권 시장 시가총액이 367조 원(국내총생산(GDP) 대비 14.5%)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IMF 보고서는 결론에서 "토큰화 금융 시스템의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 창문은 지금 열려 있지만 영원히 열려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드리안 자문관은 "정책 당국은 디지털 전환의 결과물에 사후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그 구조적 함의를 미리 파악하고 선제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밝혔다.

토큰화된 금융이 가져오는 효율과 위험은 동전의 양면이다. 문제는 그 동전이 어느 방향으로 굴러가느냐를 지금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 최대 금융 감시탑이 경보를 울린 지금이 각국 규제 당국과 시장 참여자 모두에게 설계도를 다시 꺼낼 마지막 적기라는 경고로 읽힌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