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린어페어스 “유럽, 부와 영향력만으로 안보 지키던 시대 끝”
독일 국방비 급증·징병제 부활…대서양 동맹은 실용 관계로 재편
독일 국방비 급증·징병제 부활…대서양 동맹은 실용 관계로 재편
이미지 확대보기유럽이 미국의 안보 우산에 기대던 냉전 이후 질서에서 벗어나 독자 방위 능력을 키우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러시아의 위협은 커졌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에 대한 신뢰는 약해지면서 유럽 각국이 국방비 증액과 방산 역량 강화, 병역제도 재검토에 나서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29일(현지시각) “유럽이 수십 년간 유지해온 기존 안보 모델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고 진단하며 이같이 전했다.
포린어페어스는 유럽이 그동안 ‘군사력 없는 부, 희생 없는 영향력, 의무 없는 보호’에 기대왔지만 이제 그런 방식은 끝났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우선순위에 자동으로 맞추던 유럽이 앞으로는 워싱턴의 요구에 예전처럼 따라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 러시아 위협, 유럽 중심부로 이동
유럽의 변화는 러시아 위협 인식에서 출발한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관련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럽인의 77%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의 생존에 직접적 위협이 된다고 봤다.
이 위협 인식은 동유럽과 북유럽에만 머물지 않는다. 독일 응답자의 59%, 프랑스 50%, 영국 49%도 러시아를 자국 안보의 최대 위협으로 꼽았다. 유럽 최대 경제·군사 강국들에서도 러시아 위협이 중심 의제로 떠오른 셈이다.
미국에 대한 신뢰 하락도 유럽의 재무장을 밀어붙이는 요인이다. 유럽외교협의회가 여론조사업체 유고브에 의뢰해 최근 벌인 조사에서 미국을 동맹으로 본 유럽인은 15개국 평균 11%에 그쳤다. 이는 6개월 전 16%, 2024년 11월 22%에서 크게 낮아진 수치다.
조사 대상 모든 국가에서 미국이 공격받은 유럽을 방어하러 올지 의심한다는 응답이 다수였다. 응답자의 25%는 미국을 경쟁자나 적대자로 봤다. 유럽 안보의 전제였던 미국의 자동 개입 신뢰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 국방비 급증, 독일이 앞장
유럽의 국방비는 빠르게 늘고 있다. 지난 2024년 EU 27개 회원국의 국방비는 약 4020억달러(약 621조원)로 러시아의 1600억달러(약 247조원)를 크게 웃돌았다.
특히 독일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독일은 현재 EU 전체 국방비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며 세계 4위 군사비 지출국으로 올라섰다. 독일은 오는 2029년까지 국방비를 1720억달러(약 266조원), 국내총생산(GDP)의 약 3.6% 수준으로 끌어올릴 전망이다. 이는 2022년보다 거의 200% 늘어난 규모다.
라도슬라프 시코르스키 폴란드 외교부 장관은 독일군 자체보다 독일의 군비 증강 기피가 더 걱정된다고 지난 4월 말했다. 과거 독일 재무장을 경계하던 유럽 분위기와 비교하면 큰 변화다.
프랑스는 독일의 재무장이 기존 유럽 내 역할 분담을 흔들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독일은 경제 강국, 프랑스는 군사·전략 강국이라는 구도가 있었지만 독일의 군사비 확대는 이 균형을 바꾸고 있다. 파리는 독일을 프랑스·독일 방위산업 협력 틀 안에 묶으려 하지만 성과는 아직 제한적이다.
◇ 미국 무기 의존 줄이는 방산 재편
유럽은 미국산 무기 의존도 줄이려 하고 있다. 여론조사에서도 다수 응답자는 미국 군사 장비 대신 유럽산 대안을 구매하는 데 찬성했다. 덴마크, 네덜란드, 스웨덴에서 이런 경향이 특히 강했다.
독일에서는 헬싱과 스타크 디펜스 같은 방산 스타트업이 수십억유로 규모 드론 계약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독일·우크라이나 합작 방산업체 퀀텀 프런트라인 인더스트리스는 올해 초 뮌헨 인근에서 산업 규모의 드론 생산을 시작했다.
전통 방산기업도 움직이고 있다. 독일 최대 방산업체 라인메탈은 이탈리아 레오나르도와 손잡고 이탈리아군용 보병전투차 1000대 이상과 판터 KF51 주력전차 최대 350대를 생산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의 목표는 단순히 국방비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관측이다. 미국이 제공하던 무기와 병력, 지휘 능력을 유럽이 점진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 징병제도 다시 논의
병력 확보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크로아티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스웨덴은 러시아의 침공 이후 징병제를 다시 도입했다. 덴마크, 에스토니아, 스위스도 이미 의무복무제를 운영하고 있다.
독일도 2011년 중단한 군 복무 제도를 되살리기로 했다. 초기에는 자원입대 방식에 의존하고 있지만, 지원자가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다.
지난 3월 말 기준 독일 연방군에서 자원 복무 중인 인원은 1만2700명으로 전년보다 13.5% 늘었다. 군 경력 지원자는 약 2만2700명으로 20% 증가했다. 독일은 2030년대 중반까지 현역 26만명, 예비군 20만명 체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스웨덴의 변화는 더 극적이다. 스웨덴군은 복무를 희망하는 자격 있는 젊은층이 수용 가능한 규모보다 많아, 지원자 가운데 10% 미만만 선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 미국과는 ‘감상적 우정’보다 실용적 협력
포린어페어스는 유럽이 미국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다만 과거처럼 감상적 동맹 관계에 기대기보다 이익과 필요에 따라 협력하는 실용적 파트너십으로 바뀔 가능성이 클 것으로 내다봤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포린어페어스에 낸 기고문에서 이를 “원칙 있는 현실주의”로 설명한 바 있다. 규칙과 권리에 기반한 국제질서가 약해졌고 노골적인 힘의 행사가 더 중요해진 시대에 독일도 군사력과 정보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독일과 유럽은 민주주의, 법치, 국제협력이라는 원칙을 버릴 수 없다고 본다. 세계적 규칙 질서를 혼자 떠받칠 수는 없지만 유럽과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최소한의 안정과 예측 가능성을 유지하는 지역 질서를 만들 수 있다는 구상이다.
이같은 흐름은 유럽 내부 협력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브렉시트는 영국이 유럽 단일시장을 떠날 때 치르는 경제적 비용을 보여줬다. 미국과 관세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는 스위스 사례도 작은 국가가 양자 협상에서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드러냈다.
반대로 트럼프 대통령이 덴마크를 그린란드 문제로 압박했을 때, 덴마크는 유럽 파트너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버틸 수 있었다. 기고문은 이런 경험이 유럽 각국에 집단 행동과 동맹의 필요성을 다시 각인시켰다고 분석했다.
◇ 유럽 통합에는 내부 장벽도
그러나 유럽이 하나의 방위국가처럼 움직이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27개 회원국의 이해관계가 다르고 유럽회의주의 정당의 부상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어서다.
프랑스에서는 국민연합이 내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여론조사가 나오고 있다. 국민연합은 과거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EU 탈퇴 주장을 완화했지만 유럽 통합 심화와 브뤼셀과의 안보 협력에는 부정적이다.
독일에서는 극우 성향의 독일대안당(AfD)이 전국 지지율 약 28%를 기록하며 주요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 가까운 시일 안에 총리직을 차지할 가능성은 낮지만 주정부 차원의 영향력이 커지면 독일의 유럽 재무장 구상도 제약을 받을 수 있다.
EU가 진정한 방위기구로 바뀌려면 외교·안보 분야에서 만장일치가 아닌 다수결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는 회원국들이 주권 일부를 브뤼셀에 넘기는 문제라 정치적 저항이 크다는 지적이다.
◇ 나토 안에서 유럽 주도권 확대
포린어페어스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여러 안보 협력체가 겹쳐지는 구조를 제시했다. 나토는 계속 핵심 축으로 남겠지만 유럽이 점차 나토의 계획과 지휘, 병력 제공에서 더 큰 책임을 맡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유럽 국가들의 소그룹 협력도 늘어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영국이 주도하는 합동원정군은 북유럽 10개국이 참여하는 군사 협력체로 북극과 북대서양, 발트해 지역 위기에 빠르게 대응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프랑스가 주도하는 ‘전진 억제’ 구상도 있다. 9개 유럽국가가 추가로 참여한 이 구상은 프랑스의 공중발사 핵전력과 연계된 훈련, 핵 탑재 가능 항공기 수용 기지, 우주 기반 조기경보, 방공, 장거리 타격 체계 개발을 포함한다.
이는 러시아의 핵 위협에 대응할 유럽식 억제 구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이다. 미국이 언제나 즉각 도울 것이라는 전제를 더 이상 절대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유럽, 더 이상 자동 추종하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의 갈등은 과거에도 있었다. 1956년 수에즈 운하 위기, 베트남전, 2003년 이라크전 때도 대서양 양안의 균열은 컸다. 그러나 포린어페어스는 “현재 미국과 유럽 국가들 사이의 갈등 수준은 전례 없이 높다”고 평가했다.
유럽이 단순히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종료를 기다리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은 트럼프 행정부가 끝나기 전 결정될 수 있고 이후 미국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미국의 전략 초점은 중국을 겨냥한 인도·태평양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포린어페어스는 유럽이 거의 100년 만에 스스로 안보를 책임지는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평가했다. 냉전 시기 유럽은 미국에 의존했고 냉전 이후에는 경제적 번영을 안보보다 우선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침공과 미국의 예측 불가능성은 그 질서를 끝내고 있다는 얘기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