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베스코, 29조달러 운용 국부펀드·중앙은행 조사
중앙은행 61% “미국 부채, 달러 기축통화 지위에 부담”
중앙은행 61% “미국 부채, 달러 기축통화 지위에 부담”
이미지 확대보기전 세계 국부펀드와 중앙은행들이 에너지 자산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무역 장벽, 전쟁, 해상 운송 차질,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겹치면서 에너지 안보와 전력 인프라가 포트폴리오의 핵심 방어 자산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동시에 미국 부채 증가로 달러의 장기 기축통화 지위가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졌다.
로이터통신은 글로벌 자산운용사 인베스코의 최근 설문조사를 인용해 29조달러(약 4경4776조원)를 운용하는 국부펀드와 중앙은행들이 지정학적 변화에 대응해 투자 포트폴리오를 재점검하고 있다고 29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이번 조사는 국부펀드 90곳과 중앙은행 54곳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조사 대상 기관들은 무역 관세, 해상로 폐쇄,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전쟁 같은 충격에도 버틸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더 중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에너지 안보·전환 인프라가 핵심 투자처
조사 응답자의 80%는 에너지 안보와 에너지 전환 인프라가 포트폴리오 회복력을 높일 가장 신뢰할 만한 투자처라고 답했다. 국부펀드 자산에서 인프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6년 9%까지 높아졌다.
에너지 자산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원유와 가스 가격 때문만은 아니다. 전쟁과 지정학적 긴장으로 에너지 공급망이 흔들릴 때, 발전소와 송전망, 액화천연가스(LNG) 시설, 재생에너지, 전력 저장장치 같은 기반시설의 전략적 가치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AI 투자 붐도 에너지 인프라 선호를 강화하고 있다.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생산시설은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한다. AI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전력 공급 능력과 에너지 인프라를 확보한 국가와 기업의 중요성도 커진다.
◇ 채권만으로는 분산 효과 약해져
국부펀드와 중앙은행의 포트폴리오 변화에는 채권의 역할 약화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에는 주식이 떨어질 때 채권이 오르는 식으로 자산 간 위험을 분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주식과 채권이 함께 흔들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채권만으로 위험을 줄이기 어렵다는 인식이 커졌다.
이에 따라 일부 기관은 유동성과 실물자산을 더 중시하고 있다. 에너지 인프라, 운송망, 데이터센터, 전력망 같은 자산은 금융시장 가격 변동과 다르게 움직일 수 있고, 장기 현금흐름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
국부펀드 입장에서는 자국 경제와 안보에도 도움이 되는 자산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에너지 안보와 AI 인프라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투자 판단도 단순 수익률보다 전략적 가치까지 함께 따지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 미국 부채가 달러 신뢰 흔든다
달러에 대한 우려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인베스코 조사에서 중앙은행의 61%는 미국 부채 수준이 달러의 장기 준비자산 지위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답했다. 2024년 같은 응답 비율은 20%였다.
달러는 여전히 세계 외환보유액과 무역 결제, 국제 금융시장의 중심 통화다. 그러나 미국의 재정적자와 부채 증가, 정책 불확실성, 지정학적 갈등이 겹치면서 일부 중앙은행은 달러 의존도를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올해 미국·이스라엘의 대이란 전쟁은 달러 가치를 3%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위기 때 달러가 여전히 안전자산으로 기능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미국 정책 불확실성과 높은 부채가 달러 약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달러를 완전히 대체할 통화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는 급격하기보다 점진적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응답자의 29%는 5년 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약해질 것이라고 봤다. 2022년에는 이 비율이 12%였다.
◇ 미국 금융 인프라 의존도도 재검토
일부 기관은 미국 기반 자산 보관기관과 거래상대방, 청산 인프라에 대한 의존도도 점검하고 있다. 지정학적 긴장이 커질 경우 자산 보관과 결제, 청산이 특정 국가의 금융 인프라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 자체가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인베스코에 따르면 한 유럽 중앙은행은 이미 미국 자산 보관기관을 교체했다고 밝혔다. 한 라틴아메리카 중앙은행은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 미국 밖의 자산 보관 관계를 새로 구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런 움직임은 민감한 외교·금융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한 중앙은행 응답자는 미국 금융 인프라에서 벗어나는 행동 자체가 미국에 적대적인 조치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달러 체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단순한 투자 판단을 넘어 외교적 파장을 동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각국 중앙은행과 국부펀드는 달러 의존도를 줄이고 싶어도 너무 빠른 변화가 시장과 외교 관계를 흔들 수 있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 금 보유 확대도 분산 전략
달러 불안은 금 보유 확대 움직임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조사 응답자의 3분의 1은 포트폴리오 분산 차원에서 금 보유를 늘릴 계획이라고 답했다.
금은 이자를 주지 않지만 특정 국가의 신용이나 통화정책에 직접 묶이지 않는 자산이라는 점에서 중앙은행들이 선호하는 안전자산이다. 미국 부채와 달러 신뢰성에 대한 우려가 커질수록 금은 달러 보완 자산으로 주목받을 수 있다.
최근 금값은 미국 금리 인상 우려와 달러 흐름에 따라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장기 보유 전략에서는 단기 가격보다 통화 분산과 위기 대응 기능이 더 중요하게 평가된다.
◇ 국가성 자금의 투자 기준 바뀐다
이번 조사 결과는 국부펀드와 중앙은행의 투자 기준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주식과 채권, 달러 자산을 중심으로 수익과 안정성을 조합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이제는 지정학적 충격을 버틸 수 있는 실물 인프라, 에너지 안보, 금, 비달러 금융망 같은 요소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에너지 자산으로의 이동은 AI 시대 전력 수요 증가와도 맞물린다. AI 데이터센터가 늘어날수록 전력 공급과 송전망, 에너지 저장 인프라는 단순한 공공설비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투자 수익을 동시에 좌우하는 자산이 된다.
달러는 당분간 세계 금융의 중심에 남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국부펀드와 중앙은행들이 달러, 미국 금융 인프라, 채권 중심 분산투자에 대한 기존 믿음을 다시 점검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가 작지 않다.
세계 최대 장기 투자자들이 에너지와 금, 인프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흐름은 국제 금융시장이 더 불안정하고 분절된 질서에 대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정학적 시대의 포트폴리오 전략은 이제 높은 수익률보다 충격을 견디는 힘을 더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