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의 침묵을 깬 ‘장막 뒤의 메신저’
이미지 확대보기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 막 입성했던 2017년 5월의 일이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의 첫 공식 해외 순방지였던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리츠칼튼 호텔. 공식 외교 채널과 국무부 베테랑 관료들이 배제된 야심한 시각, 사막의 어둠 속에서 두 젊은 실세가 마주 앉았다. 한쪽은 사우디 왕실의 권력을 장악해 가던 30대 초반의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MBS)이었고, 다른 한쪽은 백악관 선임고문이라는 직함을 단 36세의 미국 대통령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였다. 당시 외교가에서는 정통 외교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젊은 부동산 사업가 출신 사위가 중동의 복잡다단한 역학 구도를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깊은 회의감을 드러냈다. 워싱턴 기득권층은 그를 '대통령의 인척'이라는 후광에 기댄 아마추어로 치부했다. 그러나 새벽까지 이어진 밀담 끝에 쿠슈너는 MBS와 단순한 외교적 친분을 넘어선 거대한 거래의 축을 구축했다.
그날 밤 오간 대화는 훗날 수십 년간 얽혀 있던 아랍과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를 허문 ‘아브라함 협정(Abraham Accords)’의 밑그림이 되었고, 백악관 퇴임 후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글로벌 투자 펀드로 이어지는 권력과 자본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탄생시켰다. 쿠슈너는 전통 외교관의 언어가 아닌, 철저한 손익계산서와 ‘딜(Deal)’의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형태의 파워플레이어였다.
재러드 쿠슈너의 궤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성장한 뉴욕·뉴저지의 유대계 부동산 디벨로퍼 가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1년생인 그는 부동산 개발업자 찰스 쿠슈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사회학 학사를, 뉴욕 대학교에서 법학전문대학원(JD) 및 경영대학원(MBA) 학위를 취득했으나, 그의 청년기는 순탄한 엘리트 코스에만 머물지 않았다. 2005년, 부친 찰스 쿠슈너가 탈세, 불법 정치자금 기부, 증인 매수 혐의로 연방 검찰에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받는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부친을 기소했던 주임 검사가 훗날 트럼프 캠프에서 쿠슈너와 충돌하게 되는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였다. 24세라는 이른 나이에 가문의 사업체인 '쿠슈너 컴퍼니(Kushner Companies)'의 경영 전면에 나선 쿠슈너는 매주 앨라배마주의 연방 교도소로 면회를 다니며 냉혹한 현실 권력의 생리를 뼈저리게 체득했다.
2009년 도널드 트럼프의 장녀인 이반카 트럼프와의 결혼은 쿠슈너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부동산 재벌 가문 간의 결합을 넘어, 2016년 트럼프의 대선 출마와 함께 그는 정치적 막후 지휘관으로 급부상했다. 정치 컨설턴트들이 주도하던 기존 선거 문법과 달리, 쿠슈너는 실리콘밸리의 데이터 사이언스와 타깃 마케팅 기법을 대선 캠프에 적극 도입했다. 제한된 예산 속에서 유권자 데이터를 정밀 분석해 러스트 벨트(쇠락한 공업지대)의 스윙 스테이트를 공략하는 디지털 전략을 총괄했다. 트럼프가 대중을 열광시키는 '스피커'였다면, 쿠슈너는 그 유세를 표와 승리로 전환하는 '알고리즘'을 설계한 인물이었다.
2017년 1월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하자 쿠슈너는 백악관 선임고문(Senior Advisor to the President)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친족등용금지법 논란과 백악관 참모진의 견제 속에서도 그는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국내외 핵심 난제들을 장악해 나갔다. 그는 백악관 산하 미국 혁신국(Office of American Innovation)을 총괄하며 연방정부의 관료주의 타파와 디지털 전환을 주도했고, 의회와의 초당적 협력을 이끌어내 장기 복역자의 사회 복귀를 지원하는 형사사법개혁법(First Step Act)의 입법을 성사시켰다. 또한 기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대체하는 신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 체결 과정에서도 핵심 비공식 채널로 작동하며 통상 외교의 물꼬를 텄다.
쿠슈너의 공적 경력 중 가장 상징적이면서도 논쟁적인 대목은 바로 중동 평화 프로세스의 지휘였다. 과거 수십 년 동안 미국 국무부를 비롯한 전통 외교가는 팔레스타인 분쟁을 먼저 해결해야만 중동 평화가 가능하다는 이른바 ‘2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에 매달려 왔다. 이러한 전통적 접근법은 영토 협상과 국제 규범을 최우선 동력으로 삼았고, 다자간 타협을 통한 지역 긴장 완화를 목표로 설정했으나 수십 년간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비즈니스 협상가 출신인 쿠슈너는 전혀 다른 문법을 들고나왔다. 그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선결 과제로 두지 않고, 아랍의 온건파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직접적인 제휴를 추진하는 '거래형 접근법'을 택했다. 복잡한 명분 대신 막대한 경제 투자, 첨단 기술의 상호 공유, 실질적인 방위 협력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았다. 그 이면에는 중동 역내의 공통 안보 위협인 이란에 맞서 공동 전선을 구축하고 실리적 동맹 관계를 맺겠다는 지정학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쿠슈너의 막후 조율 끝에 2020년 하반기 이스라엘은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수단, 모로코와 연쇄적으로 국교 정상화를 선언하는 ‘아브라함 협정(Abraham Accords)’을 체결했다. 이는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 이후 26년 만에 이루어진 중동 역학 구도의 대격변이었다. 비록 팔레스타인 문제를 우회함으로써 분쟁의 불씨를 남겨두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으나, 역내 경제 교류와 안보 지형을 단기간에 재편했다는 점에서 국제정치학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어피니티 파트너스는 단순한 금융 수익 추구를 넘어 이스라엘의 첨단 테크 기업에 아랍 자본을 매칭하여 투자하거나, 세르비아 및 알바니아 등 동유럽 지역의 대규모 부동산 및 관광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를 잇달아 추진하며 ‘외교 관계의 자본화’를 실현하고 있다. 이는 공적 권력을 통해 형성된 지정학적 영향력이 퇴임 후 민간 대체투자 시장에서 어떻게 자산화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재러드 쿠슈너를 바라보는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한쪽에서는 그가 공직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대통령의 사위라는 혈연적 연줄에 기대어 대외 정책의 전권을 휘둘렀다고 비판한다. 특히 공직 수행 중 맺은 외교적 관계를 퇴임 후 거액의 펀드 유치와 개인적 사업 확장에 활용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이해충돌과 네포티즘(족벌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지적이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를 관료주의의 타성과 기존 외교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기업가적 문제 해결 방식을 도입한 탁월한 전략가로 평가한다.
수십 년간 제자리걸음을 걷던 중동 평화 협정과 북미 무역 협정에서 실질적인 돌파구를 만들어내며 성과를 입증했다는 실용주의적 해석이다. 재러드 쿠슈너는 21세기 글로벌 무대에서 ‘권력(Power)’과 ‘자본(Capital)’이 결합하는 새로운 양상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전통적인 관료제와 외교적 격식을 탈피하고, 철저히 데이터와 손익계산, 비즈니스적 딜 메이킹을 바탕으로 정책과 자본을 움직이는 그의 행보는 오늘날 국제정치와 금융 시장이 어떻게 하나로 수렴하고 있는지를 웅변한다. 백악관의 막후 실세를 거쳐 글로벌 자본의 설계자로 변신한 쿠슈너의 궤적은 향후 미국 정치 지형의 변화와 맞물려 국제 통상, 지정학적 역학, 글로벌 머니무브의 흐름을 읽는 데 있어 지속적으로 주목해야 할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