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보유액 달러 비중 71%→57%에도 경쟁 통화 동반 약화
프라사드 “현 추세라면 다극화보다 달러 지배력 강화 가능성”
프라사드 “현 추세라면 다극화보다 달러 지배력 강화 가능성”
이미지 확대보기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000년 71%에서 현재 57%까지 낮아졌지만 유로, 엔, 파운드 등 전통적인 경쟁 통화도 함께 입지가 약해졌고 중국 위안화의 국제화도 정체돼 있다는 것이다.
국제통화 체제와 디지털화폐 분야의 권위자인 에스와르 프라사드 미국 코넬대 교수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에서 최근 잭슨홀 경제정책 심포지엄에서 공동 연구자들과 발표한 연구를 토대로 금융혁신 이후 국제통화체제의 향방을 이같이 전망했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도 맡고 있는 프라사드 교수는 미국의 공공부채 증가와 중앙은행 독립성 약화 우려, 금융제재 수단으로서 달러의 활용 등을 달러 지배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꼽았다. 여러 국가가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중앙은행의 국제 준비자산에서 금 비중이 커진 것도 이런 흐름의 일부로 지목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곧바로 달러를 대체할 다른 통화의 부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란 지적이다. 오히려 달러의 비중이 줄어드는 동안 유로, 엔, 파운드 등 기존 경쟁 통화도 함께 입지가 약해졌고 중국 위안화의 국제화 역시 정체돼 있다는 것이 프라사드 교수의 분석이다.
◇ 달러 비중 줄어도 경쟁 통화도 함께 약화
그러나 달러의 자리를 대신할 통화들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프라사드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유로, 일본 엔, 영국 파운드 등 전통적인 준비통화는 국제결제와 외환보유액에서 오히려 입지가 줄었다.
호주달러, 캐나다달러, 스위스프랑은 국경 간 결제와 준비자산에서 점유율을 늘렸지만 해당 통화를 뒷받침하는 경제 규모와 금융시장 깊이가 미국에 비해 작다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미국 달러의 가장 유력한 장기 경쟁자로 꼽혀온 중국 위안화도 국제화 속도가 정체됐다.
프라사드 교수는 “중국 정부가 자본 이동 제한을 유지하는 점이 위안화의 국제적 확산을 가로막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국제통화 질서를 실제로 뒤흔들 잠재력을 가진 변수로 금융기술이 등장했다.
각국 중앙은행은 블록체인을 비롯한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국가 간 결제를 더 빠르고 저렴하게 만드는 방안을 시험하고 있다.
국경 간 거래 비용과 절차가 줄어들면 기업과 가계가 해외 자산을 보다 쉽게 매입하고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특정 통화가 누려온 기존의 우위를 낮추고 각국 통화가 비슷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프라사드 교수는 실제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날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국 자본시장이 다른 국가보다 월등히 큰 데다 미국 민간 부문이 새로운 결제·정산 기술을 빠르게 도입하고 있어 금융혁신의 혜택이 오히려 달러에 집중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테이블코인이다.
국경 간 결제에서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스테이블코인의 압도적 다수는 달러에 연동돼 있다.
프라사드 교수는 미국 정부가 가상자산에 우호적인 정책을 펴는 데다 세계적으로 달러에 대한 수요가 여전히 강한 점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거래 비용이 낮아지고 미국의 깊은 자본시장과 새로운 결제 기술이 결합하면 달러 표시 채권과 다른 금융자산의 발행과 수요를 더욱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혁신이 통화 경쟁의 장벽을 낮추지만 이미 가장 큰 금융시장을 보유한 달러가 그 효과를 더 크게 누릴 수 있는 구조다.
◇ “현 추세라면 다극화보다 달러 지배력 강화”
프라사드 교수는 금융혁신 이후 국제통화체제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첫 번째는 여러 통화가 견고한 금융·제도적 기반을 갖추고 서로 경쟁하는 진정한 다극 통화체제다. 경제정책과 제도가 건전한 국가의 통화가 선택받고 그렇지 못한 국가의 통화는 밀려나는 구조다.
두 번째는 금융혁신이 오히려 달러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는 경우다.
세 번째는 신뢰할 만한 특정 통화나 중앙은행이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국제 금융시스템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시나리오다.
프라사드 교수는 현재의 흐름이 이어진다면 두 번째인 달러 지배력 강화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평가했다.
다만 달러 의존도가 더 커지면 세계 경제와 금융시장이 미국의 정책 변화에 지금보다 훨씬 민감해지는 위험도 커진다.
미국의 무책임한 경제정책이 이어질 경우에는 달러의 신뢰가 약화되면서 다극화가 아니라 세 번째 시나리오인 무질서한 금융시스템 분열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 투자자가 널리 신뢰하는 통화가 사라질 경우 금융시장 불안이 통제하기 어려운 혼란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의 위험은 더욱 크다.
새로운 기술을 통해 자국민과 기업이 외화 자산과 해외 결제망에 손쉽게 접근하게 되면 자국 통화와 금융시스템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질 수 있다.
프라사드 교수는 이를 막기 위해 금융기술 자체를 차단하는 방식은 오히려 해당 국가를 더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각국이 해야 할 일은 금융혁신을 막는 것이 아니라 폭넓고 규제가 잘 갖춰진 금융시장을 육성하고 절제된 통화·재정정책과 법치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금융혁신이 국제통화 경쟁을 확대할 수 있지만 금융시장과 제도적 기반을 강화하지 못한 국가에는 오히려 달러 의존도를 높이고 통화주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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