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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에너지 새 병목은 정유시설…전쟁에 경유 공급망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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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에너지 새 병목은 정유시설…전쟁에 경유 공급망 흔들

중동·러시아 경유 수출 급감…서방 30년 정유투자 부진에 미국 ‘최후 공급자’로
미국 텍사스주 보몬트에 위치한 엑손모빌 정유공장.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텍사스주 보몬트에 위치한 엑손모빌 정유공장. 사진=로이터
세계 에너지 시장의 가장 취약한 고리가 원유 생산에서 정유시설로 옮겨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0년간 페르시아만 국가와 러시아가 수백억달러를 정유설비에 투자해 세계 경유 공급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크게 늘린 가운데 이란전쟁과 우크라이나전쟁이 양쪽 정유망을 동시에 흔들면서 세계적인 경유 공급 부족이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과 유럽에서는 오랜 기간 정유설비 투자가 부진했던 탓에 중동·러시아의 공급 공백을 메울 여력이 제한적이다.

20일(이하 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 경유 가격이 지난 18일 갤런당 6.45달러(약 8960원)까지 올라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하는 등 정유시설 부족이 세계 에너지 공급의 핵심 병목으로 떠올랐다.
미국의 경유 가격은 이달 처음으로 갤런당 6달러(약 8330원)를 넘어선 뒤 계속 상승하고 있다. 경유는 화물차와 산업시설, 농기계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돼 가격 상승이 물류비와 생산비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브라질 농촌지역과 리비아, 일부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수입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면서 주유소의 경유 부족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중동, 세계 경유 수출 19% 차지

현재의 공급 불안은 지난 10년간 세계 정유산업의 중심이 중동과 러시아 쪽으로 이동한 결과라는 게 WSJ의 분석이다.

중동에서는 이란전쟁 이전까지 약 10년 동안 국영 석유회사들이 대형 정유시설을 잇달아 건설했다.
쿠웨이트국영석유회사는 알주르에 세계 최대 규모 가운데 하나인 정유공장을 건설했고 아랍에미리트(UAE)는 루와이스 정유시설의 생산능력을 확대했다.

이라크는 카르발라에 새 정유공장을 열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아람코도 홍해 인근에 두 곳의 정유시설을 건설했다.

이 같은 투자를 바탕으로 중동의 경유 수출량은 2017년부터 2025년 사이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지난해에는 중동이 세계 경유 수출의 19%를 차지하며 북미를 제치고 세계 최대 경유 수출지역으로 올라섰다.

러시아 역시 신규 정유공장을 대거 짓는 대신 기존 설비를 현대화하면서 경유 생산능력을 확대했다.

러시아의 경유 수출은 2017년부터 2023년까지 약 3분의 1 증가했다.

◇두 전쟁이 동시에 정유망 타격

문제는 세계 경유 공급에서 비중이 커진 두 지역이 동시에 전쟁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호르무즈해협의 운송 차질로 쿠웨이트, UAE, 이라크가 경유 수출을 크게 줄였다.

최근 예멘 후티 세력의 공격이 확대되면서 사우디아라비아가 호르무즈해협을 우회하기 위해 활용해온 홍해 정유시설의 수출도 제한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도 공급난을 심화시키고 있다.

드론 공격으로 러시아 정유시설 피해가 누적되면서 경유 수출은 거의 중단된 수준까지 감소했다고 WSJ는 전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이란전쟁 이전과 비교해 페르시아만에서 시장에 공급되지 못하고 있는 경유 물량은 러시아에서 사라진 물량의 약 세 배에 달한다.

데이비드 마틴 IEA 선임 석유시장 분석가는 “현재의 경유시장은 과거 어느 때보다 빠듯한 상황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원유와 경유 가격의 차이인 정제마진도 여러 시장에서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서방은 30년 가까이 신규 정유투자 부진

중동과 러시아가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동안 미국과 유럽의 정유산업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중동 국영기업들이 대규모 정유설비를 가동하면서 세계 정제마진이 압박받자 서방 석유회사들은 수익성이 낮은 정유사업의 비중을 축소했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석유회사들은 약 30년 동안 대규모 신규 정유공장을 거의 건설하지 않았다.

지난 2015년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12곳이 넘는 정유시설이 폐쇄됐다.

앨런 겔더 우드맥켄지 정유·화학·석유시장 담당 수석부사장은 “중동의 국영 석유회사들은 투자수익뿐 아니라 고용과 에너지안보를 고려해 정유시설을 건설할 수 있었지만 서방 민간 석유회사들은 낮은 투자수익률 때문에 사업 비중을 줄였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중동과 러시아에서 동시에 공급 차질이 발생하자 서방의 정유업체들이 이를 대체할 설비 여력이 부족해졌다.

미국과 유럽 정유공장들은 현재 가동능력에 가까운 수준으로 운영하면서 휘발유와 항공유 생산 일부를 줄이고 경유 생산을 늘리고 있지만 중동·러시아의 공급 감소분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다.

◇미국이 ‘최후 공급자’…수출금지론까지

이란전쟁과 우크라이나전쟁 이후 미국은 사실상 세계 경유시장의 ‘최후 공급자’ 역할을 하고 있다.

전쟁 이전 세계 석유제품 시장에서는 중동 정유업체들이 주로 아시아와 유럽에 제품을 공급하고 미국은 유럽에 대량의 경유를 수출했다.

유럽은 미국에 휘발유를 공급했고 러시아는 튀르키예, 인도, 중국 등에 경유를 판매하는 방식으로 세계 공급망이 연결돼 있었다.

호르무즈해협과 홍해의 운송 차질, 러시아 정유시설 피해가 이런 교역 흐름을 동시에 끊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미국 내 경유 가격까지 급등하면서 미국 정치권에서는 경유를 비롯한 정제유 수출을 제한하자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 실제로 경유 수출을 금지할 경우 미국 내 공급 확대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다른 국가의 가격은 더 크게 오를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WSJ는 미국의 수출 제한이 중국과 인도 같은 다른 주요 수출국의 유사 조치를 촉발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이미 정유시설 피해로 수출을 대폭 제한하고 있고 중국도 정유제품 수출량을 억제하고 있다. 인도는 경유와 휘발유에 수출세를 부과했다.

◇유일한 여유는 중국…하지만 풀가동 안 해

중동과 러시아를 제외하면 상당한 잉여 정유능력을 가진 국가는 중국이 사실상 유일하다.

그러나 중국 정유업체들은 높은 정제마진에도 원유 구매를 제한하고 설비를 최대 수준으로 가동하지 않고 있다.

겔더 수석부사장은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이 정유제품 수출을 늘리기 위해 대규모 원유를 추가 구매할 경우 국제유가 자체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단기적인 수출 수익보다는 국가 전체의 에너지안보와 공급망 안정성을 우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에너지시장은 오랫동안 원유 매장량과 산유국의 생산능력을 공급 안정성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봐왔다.

그러나 중동과 러시아에 정유능력이 집중되고 서방의 정유투자가 장기간 줄어든 상황에서 두 지역의 전쟁이 동시에 격화하면서 원유를 휘발유와 경유, 항공유 등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으로 바꾸는 정유시설 자체가 세계 에너지 공급의 새로운 병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