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산구 경리단 길에서도 비슷한 색감의 철구조물이 쉽게 발견된다. 이곳은 요즘 뜨고 있는 맛 집이 의외로 많고, 가게 건물의 외양이 독특해서 소소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올망졸망한 가게의 간판과 문은 녹슨 철강재이다.
아마도 가게주인들은 건물을 리모델링하면서 옛날 동네 분위기와 잘 어울리고 이웃한 이태원과 차별화하기 위해 녹슨 철강재를 선택한 것 같다. 상점 주인들은 “길을 걸을 때 녹을 조심 하라”고 친절하게 주의를 준다. 건성으로 듣다간 옷에 녹을 묻히기 십상이다.
녹슨 철강재는 ‘코르텐 스틸’이다. 이 철강재는 내식성이 뛰어난 고장력강이다. 미국 US스틸사가 1933년에 개발하여 1950년대 초에 상표등록을 마친 명품 철강재이다. 워낙 유명세를 타자 일본 후지(富士)제철이 US스틸사와 기술 제휴하여 후지코르텐강을 내놓았다. 이 철강재에는 니켈, 크로늄, 동 등을 함유하는 외에 인, 유황이 첨가되어 있다.

코르텐 스틸은 초기에는 컨테이너와 화물차 중심의 차량 부재에 주로 사용됐다. 그러나 1958년, 세계적인 농기계 제조업체 존디어 본사 빌딩에 외장 및 구조재로 무도장을 사용하면서 코르텐 스틸은 각광을 받는다. 1964년에는 처음으로 교량에 적용되었고, USE 타워(U.S. Steel 본사)의 외부 구조재와 커튼월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지금은 교량, 건축물, 송전탑 등 대기에 노출되는 대부분의 강구조물과 건자재에 사용되고 있다. 강교량의 16~20%가 무도장 코르텐 스틸을 소재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강재의 문제는 녹이다. 대부분의 철강재는 녹이 발생하고 부식이 진행된다. 그러나 코르텐 스틸의 녹은 일반 철강재와는 다르다. 녹이 나타나지만 ‘안정 녹’이다.
이 녹은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변한다. 처음에는 진한 와인색깔에서 레드로 변하고, 완전한 녹이 형성되면 더 이상 녹물이 흐르지 않는 진한 커피색으로 변한다. 5~6년 후에는 검정색으로 변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내후성강(부식철판)과 코르텐 스틸(Cor-ten)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고, 생산 과정도 다르다. 코르텐 스틸은 냉간 주조방식으로 생산되어 조직이 매우 치밀하지만 내후성강은 열간 주조방식이어서 내구성이 떨어진다. 코르텐 스틸의 장점은 유지 보수 없이 영구적인 보존상태가 지속된다는 점이다. 이런 장점 때문에 코르텐 스틸은 예술조형물, 종교 건축물, 미술관 등 미적 효과가 필요한 건축물과 예술품 등에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정관모씨와 승효상씨가 코르텐 스틸을 건축물과 조형물의 소재로 썼다. C아트뮤지엄(경기도 양평군)에는 폭 15m, 높이 15m의 예수 얼굴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받침대까지의 높이가 22.5m이다. 조각가인 정관모(성신여대 명예교수)씨가 1년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이 예수상은 코르텐 스틸로 만든 세계 최대의 크기라고 한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철의 녹슨 색깔이 더욱 짙어져 이 작품의 성격을 진지하게 드러낸다. 건축가 승효상씨는 자택 겸 사무실 건물을 코르텐 스틸로 지었다. 서울 동숭동 언덕 위에 지은 5층 규모의 일명 ‘이로재’는 코르텐 스틸을 외장재로 사용해 2002년 완공된 건물이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기억을 담기에 이만한 재료(코르텐 스틸)가 없다”고 할 정도로 코르텐 스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이런 연유로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주변을 코르텐 스틸로 조성했다.
코르텐 스틸은 철판 표면에 발생한 녹을 통해 인간들에게 자연스럽게 과거의 기억을 되찾아주는 진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동국제강 본사 건물에 설치된 ‘37.5도 아크(Arc)’는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원석이 거대한 강철구조물에 기대어 있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라는데 세계적인 조형작가 베르나르 브네의 작품이다. 이 작품도 코르텐 스틸을 사용했다. 조형물의 규모는 높이 38m, 무게는 20t이나 된다.
1970년대 국내 최초의 최고층 건물이었던 삼일빌딩(을지로)의 내부 철구조물은 H형강(SS41)을 사용하고 유리 커튼월 후레임은 코르텐 스틸을 재료로 했다. 두 가지 소재 모두 국내 처음으로 사용했다. 지금은 산업은행이 사용하고 있는 삼일빌딩은 스테인리스 스틸을 생산하던 옛 삼미특수강의 본사 건물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기업이미지에 알맞은 철강재를 빌딩건축에 적극 사용했다.

이 건물 시공 당시에는 일본 기술자가 파견되어 시공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코르텐 스틸을 생산하지 못하고 전량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에 당연한 조치였지만 이 철강재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산업분야에서는 심각한 경쟁력에 시달려야 했다. 철강산업이 제조 산업의 핵심이 되는 절실한 대목이다.
1982년 컨테이너공업협회장은 “포스코(당시 포항제철)가 코르텐 스틸의 생산을 위해 적극 연구개발에 나서면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철강업계를 향해 코르텐 스틸의 국산화를 호소했다.
그때 컨테이너 산업계는 스틸컨테이너, 알루미늄컨테이너, 탱커컨테이너, 오픈탑 컨테이너 등 다양한 컨테이너를 국산화(94%)하여, 미, 영 등 세계 각국으로 수출했던 중요한 철강 수요산업이었지만 코르텐 스틸을 전량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야 하는 안타까운 환경에 처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코르텐 스틸을 건축에 접목시켜 세계적인 건축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도 있다. 스페인의 '자크 헤르조그'와 '피에르 드 뮤론'이다. 1950년 바젤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친구 사이였던 이들은 스위스연방공과대학을 마친 다음 1978년, 사무실을 열고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만드는 기회를 갖는다.
이들은 런던 템즈강변에 방치된 화력발전소를 ‘테이트 모던’ 현대미술관으로 개조하여 명성을 높이더니 7년 후(2007년)에는 또한번 화력발전소 리노베이션 작업을 통해 ‘카이샤 포럼’(Caixa Forum)을 완성시켜 전세계의 이목을 끌어낸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소재한 ‘카이샤 포럼’(Caixa Forum)은 붉은 지붕을 얹은 듯한 모양 때문에 ‘상상력이 탁월한 건축물’로 잘 알려져 있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는 미술관으로 자리 잡았다. 카이샤 포럼이 주목을 받는 것은 독특한 창의력으로 재건된 미술관의 변신과정과 카이샤 그룹의 문화공헌 때문이다.
카이샤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금융그룹의 이름이다. 이 그룹은 시민들에게 복지와 문화를 무료로 제공하는 카이샤 포럼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전시를 무료로 할 수 있다. 삼성그룹이 1300억여 원을 들여 리움 미술관을 설립했지만 카이샤그룹은 2700여억 원을 투입하여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했다. 한국과 스페인 기업의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이다.
아무튼 카이샤그룹은 2001년에 마드리드 구도심에 방치된 메디오디아(Madiodia) 화력발전소를 전격 매입하고, 발전소 건물을 자신들이 원하는 최고의 문화 예술시설로 개조하는데 헤르조그와 드 뮤론의 창의적인 설계를 전격 채용한다. 카이샤그룹은 화력발전소 건물을 미술관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증축을 결정한다. 높이 17m였던 기존 발전소 건물은 27m로 높여졌다. 그리고 10m 이상 증축된 건물외관은 코르텐 스틸을 사용했다. 새로 재건된 미술관의 외양은 기존 건물에 왕관을 씌운 듯한 형태로 드러났다. 또 코르텐 스틸의 붉게 녹슨 모습은 100년이 넘은 빛바랜 벽돌과 시각적으로 적절하게 어우러졌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카이샤 포럼에는 두 가지 패턴의 코르텐 스틸이 사용됐다. 하나는 녹의 붉은 빛깔을 외벽에 그대로 드러나게 해서 과거와 현대를 조화롭게 만든 것이며, 다른 하나는 코르텐 스틸을 심하게 부식시켜 아예 수많은 구멍이 뚫리게 한 독특한 문양을 만들고, 그것을 창문에 설치하여 빛이 실내로 쏟아 들어오게 했다.
코르텐 스틸 구멍 사이로 마드리드의 도시 풍경을 엿보는 관람객들은 절로 감탄사를 자아냈다. 한마디로 카이샤 포럼을 찾는 관람객들은 예술품과 함께 코르텐 스틸이 만들어 주는 새로운 시공간을 만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랬으니 세계 유력 건축가들의 찬사는 당연했다. 이처럼 카이샤 포럼은 철강인이 창조한 새로운 철강재와 건축가의 예술성이 만나 환상적인 공간을 만들어 낸 대표적인 미술관이란 유명세를 얻게 된 것이다. 지금은 이 건물을 보려고 관광객들이 카이샤포럼을 찾아오는 부가적인 경제효과도 얻고 있다.

벨기에 건축가 ‘마리 가자니티’(1956년생)는 코르텐 스틸을 아파트 건물 벽에 주재료로 사용했다. 브뤼셀의 쉐어백 지역에 세워진 한 아파트 건물은 콘크리트 구조 위에 스테인리스 스틸을 감쌌으며, 그 위에 갈색의 산화 처리된 코르텐 스틸판을 고정시켜 건축물 외형을 형성하고 있다. 또 한사람, 코르텐 스틸을 떡 주무르듯 하는 예술가는 ‘리차드 세라’이다. 그는 미니멀리즘 조각의 대가로 불리는데 수십 톤에서 수백 톤에 이르는 대형 조각품의 소재를 모두 코르텐 스틸로 만들었다. 그의 이런 성향은 제강소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험과 조선소에서 배관공으로 일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그는 코르텐 스틸 재료를 거대하게 펴서 감은 듯한 형태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작품 이 너무 크고, 통행이 불편하다는 민원에 시달리기도 했다. 1977년 카셀의 미술박람회에 세워진 ‘터미널(Terminal)’은 박람회가 끝난 후 카셀로 옮겨졌다가 다시 보쿰(Bohum)시로 옮겨졌고, 높이 3.5m, 길이 35m의 ‘Tilted Arc’는 뉴욕 페더럴 플라자에 설치됐지만 플라자 진입을 방해한다는 민원 때문에 해체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 ‘스네이크(Snake)’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한 곳에 오래도록 전시되어 많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코르텐 스틸의 장점을 잘 알려주고 있다. 이 작품은 스틸 조각을 포함해서 8개의 작품이 물결모양의 길을 만들고 있다. 높이는 4m이며, 무게는 44톤~276톤에 이른다.
자연을 관람하는 전망대에도 코르텐 스틸은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노르웨이 건축가 ‘라이울프 람스타드’가 만든 트롤스티겐 전망대는 연갈색의 녹슨 철제 보도를 길게 구축하고 맨 끝에 유리로 마감된 전망 장소를 만들었다. 노르웨이의 겨울은 보통 몇 미터씩의 눈이 쌓이기 때문에 건축물이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있어야 하므로 묵직한 코르텐 스틸을 사용한 것이다. 이 전망대는 연갈색의 녹이 계절에 따라 노란색과 갈색으로 변화하면서 자연친화적인 전망대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트롤스티겐 전망대가 관광객들에게 호평을 받자 많은 나라에서 코르텐 스틸을 전망대 건축 소재로 사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철강재는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가진 건축가를 만났을 때 주변과 어울려 더욱 아름다워 지는 재주를 피운다. 이처럼 철은 제조 산업 현장이나 예술 공간에 핵심 소재로 사용되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움을 더해가는 건축물을 만들고 있다. 바로 이런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부단히 철강신소재를 개발해야 한다.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 철강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