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2)]
머리 아닌 마음 통해야 원만한 인간관계 숙성
대화를 잘하기 위해선 말하기·듣기 교육 중요
상대방 감정에 반응하는 마음의 소리 잘 들어야

얼마 전 청소년 대상의 한 연구조사에서 이 사실을 입증하는 결과가 나왔다. 청소년들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부모, 교사, 친구 중에서 누구와 의논하고 싶으냐?” 라고 물었다. 그 결과 청소년들은 예상외로 제일 먼저 부모와 의논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질문을 바꾸어,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지금까지 실제적으로 누구와 의논을 하였는가?”라고 물으면 친구라고 답한 청소년이 제일 많았다. 결국 ‘하고 싶은 대상’과 ‘하는 대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묻자 청소년들은 한결같이 “부모와는 말이 안 통하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도대체 가장 친밀한 사이인 부부 간에 또는 부모와 자녀 간에 왜 말이 안 통할까?
'통즉불통 불통즉통'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삶에서 아주 중요시한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핵심이다. 한자의 사람을 뜻하는 ‘인(人)’자가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미루어보아도 알 수 있다. 영어의 ‘human man’을 뜻하는 ‘인간(人間)’이라는 단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로 보는 문화에서는 당연히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느냐, 못 맺느냐가 행복한 삶에 직결되어 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라는 속담에서도 암시되어 있듯이 대화는 ‘오고 가는’ 것이다. 잘 이루어지는 대화는 마치 숙달된 테니스 선수들이 경기를 할 때 공이 오고 가는 횟수가 길어지고 절묘한 플레이가 펼쳐져 관중들을 매료시키듯이, 계속 그치고 않고 말이 오고 가면서 물 흐르듯 대화가 진행되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르익게 한다.
'듣기'와 '말하기'
대화를 하는 기본 목적은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서로 나누려는 것이다. 대화의 본질은 ‘듣기’와 ‘말하기’를 통한 의사소통이다. 상대방과 무엇인가를 나누려면 먼저 나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고(말하기), 동시에 상대방의 의사를 정확히 이해하여야 한다(듣기). 즉 대화를 잘 하려면 듣기와 말하기를 잘 해야 한다. 나의 생각을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전달하는 것, 다시 말하면 말을 잘 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필수적인 능력이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과 좋은 비전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설득력 있게 잘 전달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말하기’를 가르쳐주는 학원이 성행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화를 잘 하기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능력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그에 적절한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말을 잘 한다고 해도 상대방의 생각이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 한다면 동문서답식의 대화가 이루어져 결국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리대화'와 '심정대화'
대화를 통해 무엇을 소통하려고 하는지 그 목적에 따라 대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하는 대화의 가장 큰 목적은 ‘지식’이나 ‘정보’를 얻고 주는 것이다. 매일매일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대화를 통해 얻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또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를 필요한 상대방에게 정확히 알려주어야 한다.
이렇듯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주고받기 위해 하는 대화를 사리대화(事理對話)라고 한다. 비유적으로 말해 지식과 정보는 머리 속에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지식과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속칭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사리대화에서는 주고받는 지식이나 정보가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즉 사리에 합당한 지식은 맞는 지식이고 사리에 적당하지 않은 정보는 틀린 것이다.
길을 잘 모르는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탄 경우를 생각해 보자. 먼저 택시 기사에게 정확히 어디를 가는지 말해야 한다. 그리고는 약속 시간에 맞춰 갈 수 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얼마나 걸리는지를 묻는다. 그러면 당연히 택시 기사는 얼마 정도 걸리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이 예에서 보듯이, 사리대화에서는 정확히 묻고 답하는 ‘말하기’가 기본이다.
대화를 통해 소통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감정’을 나누는 것이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또한 상대방의 감정을 잘 이해하는 것이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는 지름길이다. 나의 감정을 잘 헤아려줄 때 우리는 상대방이 나를 잘 이해해 준다고 여기며, 상대방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믿음을 가지게 된다. 상대방도 또한 자신의 감정을 잘 받아줄 때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더욱 신뢰하게 된다. 이 과정이 되풀이 되면, 더욱 더 상대방을 신뢰하게 되고 더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게 된다.
반대로, 상대방이 나의 감정을 알아주지 못하거나 무시할 때 마음이 상하게 되고 더 이상의 대화를 하려는 마음이 없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거나 되풀이되면 결국 인간관계는 삭막해지고 친밀한 관계 맺기가 어려워진다. 이처럼 감정을 주고받기 위한 대화를 ‘심정대화(心情對話)’라고 부른다. 감정은 ‘마음’ 속에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심정대화가 잘 이루어지는 관계를 ‘마음이 통하는’ 관계라고 한다.

심정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의 표면에 나타나 있는 내용보다 그 밑에 깔려있는 감정에 반응해야 한다. 즉, 상대방의 마음의 소리를 잘 들어줘야 한다. 차마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한 속마음까지 상대방이 이해하고 반응해준다면 그 고마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상대방이 너무 믿음직하게 느껴질 것이다. 심정대화에는 ‘듣기’가 기본이다. 내 마음을 잘 이해해주고 감정을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내가 필요한 정보를 정확히 알려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거나 불필요한 정보를 자꾸 주려고 하면 짜증이 난다.
우리말에 “마음이 통하는 사이”라는 표현은 있어도 “머리가 통하는 사이”라는 용어는 없다. 다시 말하면, 친밀한 인간관계는 ‘마음’이 통하는 사이이지 ‘머리’가 통하는 사이가 아니다. 물론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주고받다 보면 친밀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이는 그 과정에서 서로 상대방의 배려와 관심을 느껴서 친해지는 것이지 단지 주고받는 지식이나 정보의 양에 의해 친한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투다가 정들었다”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로 다투는 것도 관심이 있다는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에 정들 수 있는 것이다.
교사와 학생,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등 모든 관계에서 서로 통(通)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는 심정대화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인이 남편에게 “당신과는 통하지 않아”라고 불평을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내 마음을 몰라준다”는 것이다. 친밀한 관계에서 상대방이 내 마음을 몰라주면 더욱 야속하게 느껴지고 마음 속에 불만이 쌓이게 된다. 이 과정이 되풀이 되면 결국 그 관계는 소원해지고 대화가 멈추게 된다. “당신하고 이야기하기보다 차라리 벽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 더 낫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면 그 관계는 이미 더 이상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불통(不通)’의 사회가 되어가는 이유는 ‘말하기’를 가르쳐주는 곳은 많아도 ‘듣기’를 알려주는 곳은 없다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많아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없는 사회, 말은 잘 하지만 마음의 소리를 들을 줄은 모르는 사람이 많은 사회, 이런 사회는 경제적으로 가진 것이 많아진다고 해도 행복하지 못한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