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리아에 부과했던 제재 조치를 전면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 순방 중 한 연설에서 “시리아에 중대한 기회를 주기 위해 시리아를 상대로 한 제재 중단을 지시하겠다”고 밝혔다.트럼프의 제재 해제 결정은 향후 시리아와의 관계 정상화 수순으로 평가된다. 미국은 2011년 시리아에서 내전으로 인한 인권 탄압이 이어지자 이듬해 단교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시리아 제재 해제 결정 배경에는 이란을 견제하려는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 국가의 단합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이날 포럼 현장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미국은 시리아 내전 당시인 지난 2012년 시리아와 단교하고 대사관을 폐쇄했다. 시리아는 오랫동안 미국과 적대적 관계를 이어왔다. 이슬람 수니파 하야트타흐리르알샴(HTS)의 수장이자 반군 연합사령관인 알샤라는 오랜 내전 끝에 최근 독재자 아사드를 몰아내고 수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이후 세워진 과도정부에서 실권을 잡았다. 1982년 시리아 골란고원에서 태어난 알샤라는 2003년 이라크전쟁 당시 알카에다에 합류했다가 미군에 체포돼 5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이후 석방돼 2012년 알카에다 연계 조직이자 HTS의 전신인 알누스라 전선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오랫동안 ‘무함마드 알졸라니’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2016년 알카에다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이듬해 알누스라 전선의 이름을 HTS로 변경했다. 미국은 알샤라의 알카에다 전력을 문제 삼아 시리아의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알카에다는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살라프파 무슬림 국제 무장세력이다. 1990년대 이래 주로 미국을 표적으로 테러를 해왔다. 특히 2001년에는 비행기를 납치해 펜타곤·무역센터빌딩 등과 공중 충돌시켜 엄청난 인명을 살상한 이른바 9·11사태를 주도하기도 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최대의 원수이자 가상적 1호였다. 알샤라는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린 이후 가명과 군복 대신 본명과 양복 차림으로 국제 무대에 섰다. 모든 종교와 민족을 포용하는 통치를 약속하며 극단주의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와의 연계를 부인하는 등 서방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오랜 내전으로 붕괴된 시리아 경제를 재건하려면 서방의 경제 제재 해제와 테러단체 지정 철회가 필수적이다.
트럼프는 알샤라에게 걸었던 1000만 달러의 현상금도 해제했다. 알샤라와 HTS가 언제 또 과거의 극단주의적 태도로 회귀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트럼프가 별다른 조건 없이 시리아 과도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알카에다 대원 출신인 알샤라가 이끄는 시리아 과도정부를 미국이 승인한 것부터가 예삿일이 아니다. 트럼프는 단순한 승인을 넘어 모든 제재를 다 풀었다. 나아가 경제협력을 약속하기도 했다. 미국과 시리아의 관계 정상화는 세계사의 지평을 또 한번 크게 바꾸는 역사적 사건이다.
트럼프가 시리아를 끌어안은 가장 큰 이유는 '아브라함 협정(Abraham Accords)'이다. 아브라함 협정은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 이스라엘과 바레인 사이에서 2020년 9월 15일에 체결된 아랍-이스라엘 정상화에 관한 양자 협정이다. 미국이 중재한 2020년 8월 13일의 발표는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의 관계 개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20년 9월 11일에는 이스라엘과 바레인 간 협정이 발표되었다. 이 두 협정의 일환으로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은 모두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해 완전한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의 최초 협정은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평화조약이 발효된 이후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첫 사례였다. 이 협정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예언자 아브라함에 대한 공통된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아브라함 협정'으로 명명됐다. 2020년 10월 이스라엘과 수단도 아브라함 협정의 이름 아래 관계 정상화에 동의했다. 미국은 그 대가로 수단을 테러지원국 목록에서 제외하고 12억 달러의 대출을 제공했다. 이어 모로코-이스라엘 협정도 체결됐다. 모로코가 이스라엘 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미국은 서사하라에 대한 모로코의 주권을 인정했다.
아브라함 협정은 트럼프가 1기 시절부터 펴오던 대표적인 중동 정책이다. 아브라함 협정의 골자는 이스라엘과 이웃 중동 국가들이 선린 우호관계를 맺도록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둘러싼 중동 지역의 분쟁을 근원적으로 차단해 보자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일어난 역대 대부분의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문제로 분쟁에 빠졌을 때 주변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을 지원하면서 확산돼왔다.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그 전쟁의 고리를 차단하겠다는 구상이다. 설혹 팔레스타인과 분쟁이 터지더라도 그 전쟁이 주변의 다른 나라들로 번지지 않도록 외교적 기반을 다지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를 전격 포용한 것도 시리아를 이스라엘과 함께 아브라함 협정으로 묶기 위한 전략이다.
아브라함 협정의 화룡점정은 사우디와 이스라엘 간의 수교다. 아랍권의 맹주인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함께 아브라함 협정의 틀 속에서 우방 관계로 거듭나면 이스라엘의 안보는 더욱 공고해진다. 트럼프는 이란을 빼고 다른 모든 아랍 국가들을 아브라함 협정으로 묶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특히 사우디에 대해서는 이스라엘과 아브라함 협정을 맺으면 미국이 이란으로부터 사우디의 안보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트럼프의 아브라함 협정은 수니파와 시아파의 헤게모니 갈등 속에 서로 어르렁거리고 있는 사우디와 이란의 긴장 관계를 이용해 사우디를 이스라엘 편으로 끌어들이자는 것이다.
하마스가 2023년 가자 전쟁을 일으킨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아브라함 협정 구상을 저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우디와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협정을 체결하고 나면 팔레스타인은 유사시에 사우디 등 아랍 국가들의 군사적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진다. 실제로 미국과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협정을 구상한 가장 큰 이유도 팔레스타인과 아랍 국가의 동맹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과 사우디는 페트로-달러로 묶여 있는 동맹이기도 하다. 페트로-달러란 달러로만 석유 대금을 결제할 수 있도록 한 미국과 사우디의 협약이다. 1973년 금태환제도 포기로 달러화의 공신력이 떨어졌을 때 미국과 사우디가 국제 원유는 오로지 달러로만 거래하도록 하는 협약을 맺었다. 미국은 페트로 달러를 통해 세계 원유 시장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 금태환제도 포기 이후에도 세계 기축통화로서 달러 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대신 미국은 사우디의 안보를 책임져왔다. 트럼프의 아브라함 협정은 이란의 위협에 처해 있는 사우디의 안보를 미국이 보장하면서 이스라엘과 사우디를 하나로 묶어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해 보겠다는 또 하나의 페트로-달러인 셈이다. 관세 폭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트럼프가 굳이 중동까지 날아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