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김대호 진단] 노벨경제학상 석학의 경고 "생산성 패러독스"

글로벌이코노믹

[김대호 진단] 노벨경제학상 석학의 경고 "생산성 패러독스"

김대호 박사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전 고려대 교수  이미지 확대보기
김대호 박사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전 고려대 교수
컴퓨터 시대가 도처에 도래했음을 볼 수 있지만 생산성 통계에서만은 그것을 볼 수 없다.(You can see the computer age everywhere but in the productivity statistics.) 1987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솔로 (Robert Solow)가 한 말이다.

지독한 역설이다. 40년 전 세계 경제학계를 뒤흔들었던 이 거장의 일침은 오늘날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서사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우리에게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인류 경제사는 새로운 혁신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환호와 회의론이 교차하는 드라마를 반복해 왔다. 지난 몇 년간 글로벌 금융시장과 산업계는 생성형 AI가 가져올 유토피아적 미래에 도취되어 있었다.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코드를 작성하며, 예술을 창조하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류가 직면한 저성장과 고령화, 노동생산성 정체라는 구조적 난제를 단숨에 해결해 줄 구원투수로 추앙받았다. 엔비디아를 비롯한 인프라 기업들의 주가는 수직 상승했고,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기술 패권을 선점하기 위해 매년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자본지출(CAPEX)을 데이터센터와 핵심 반도체 칩에 쏟아붓고 있다.

이 눈부신 기술 신화의 정점에서 우리는 불길한 질문과 자주 마주하게 되었다. 천문학적인 자금 투입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산업 전체의 거시경제 통계 어디에서도 눈에 띄는 생산성 향상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AI 생산성 패러독스(AI Productivity Paradox)’의 출현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와 실물 경제의 성과 사이의 심각한 괴리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유령을 불러내고 있다. 바로 ‘AI 거품론(Dot-com Bubble 2.0)’이다. 우리는 지금 단순한 낙관을 넘어, 이 거대한 기술적 투자가 과연 실현 가능한 이익을 담보하고 있는지, 아니면 1990년대 말 정보통신(IT) 거품의 비극적 재현인지에 대한 냉정한 경제학적 진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 직면했다.

AI 생산성 패러독스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현상의 명명자이자 현대 거시경제학의 기틀을 다진 거장, 로버트 솔로(Robert M. Solow, 1924~2023) 교수의 가르침을 되짚어보아야 한다. 솔로 교수는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성장하는지를 수학적 체계로 명쾌하게 규명해 낸 '현대 성장이론의 아버지'이다. 그는 기술 혁신이 자본과 노동을 압도하는 경제 성장의 궁극적 핵심 동인임을 입증한 공로로 1987년 노벨 경제학상을 단독 수상하였다.
그가 정립한 ‘솔로-스완 성장 모델(Solow-Swan Growth Model)’은 한 국가의 경제가 지속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를 규명했다. 과거 주류 경제학은 공장과 설비를 늘리고(자본 투입), 근로자를 더 많이 고용하면(노동 투입) 경제가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솔로는 '수확체감의 법칙'을 적용하여, 기술적 진보 없이 자본과 노동의 양적 투입만 늘릴 경우 갈수록 그 효율성이 떨어져 결국 투자가 감가상각을 상쇄하지 못하는 성장의 정체 상태, 즉 '정상상태(Steady State)'에 도달하게 됨을 증명하였다.

솔로는 정체된 경제를 다시 도약하게 만드는 열쇠로 '기술 진보(Technical Progress)'를 제시하였다. 실제 경제 데이터를 바탕으로 성장의 원인을 추적한 결과, 노동과 자본의 투입량 증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형적으로 거대한 성장분'이 존재함을 발견한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이 미지의 성장 원인을 그의 이름을 따서 ‘솔로 잔차(Solow Residual)’ 혹은 ‘총요소생산성(TFP·Total Factor Productivity)’이라 부른다. 이는 교육 수준의 향상, 경영 효율화, 과학기술의 혁신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현대 경제학에서 국가 경쟁력을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솔로 교수는 기술 진보가 경제 성장의 핵심이라 주장했으나, 정작 인류가 역사상 가장 가파른 기술 혁신을 목도하던 시기에 기묘한 모순을 발견하고 앞서 인용한 독설을 날리게 된다. 1970~80년대는 IBM의 메인프레임 컴퓨터와 애플, IBM의 개인용 PC(Personal Computer)가 미국의 모든 사무실과 공장에 대대적으로 보급되던 시기였다. 당대의 기업가들과 관료들은 컴퓨터의 도입으로 업무 속도가 획기적으로 빨라져 경제 전체의 생산성이 폭발할 것이라 낙관하였다. 놀랍게도 당시 미국 정부가 집계한 국가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던 1950~60년대(연평균 약 3%)의 절반 수준인 1~1.5%대로 급락해 있었다. 기업들이 컴퓨터 구입과 전산망 구축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집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시경제 통계는 오히려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경제학계는 이 기이한 현상을 '솔로 패러독스' 혹은 'IT 생산성 패러독스'라 명명했다.

오늘날의 AI 역시 마찬가지다. 챗GPT로 대변되는 거대언어모델(LLM)이 사무실의 풍경을 바꾸고 미디어를 장식하고 있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나 한국은행이 집계하는 생산성 지표는 여전히 장기 침체 곡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 이토록 강력해 보이는 기술이 거시경제 수치에 즉각 반영되지 못하는 것일까? 첫째, '시차(Time Lag)의 법칙'과 조직의 경직성 때문이다. 경제학에서 새로운 기술이 사회 전반의 구조적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범용 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y)’로 자리 잡기까지는 반드시 기나긴 적응 기간이 소모된다. 19세기 말 전기가 발명되었을 때, 증기기관 기반의 공장들이 전기 모터 중심의 효율적인 생산 라인으로 공정을 재배치하고 근로자들을 재교육하는 데는 무려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기술 그 자체의 완성도보다 이를 활용해 비즈니스 모델을 혁신하고 조직 체계를 개편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지금의 AI 역시 도입 초기의 탐색적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 기업의 핵심 운영 시스템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했다.

둘째, 기술의 미성숙과 '검증 비용'의 발생을 들 수 있다. 생성형 AI의 치명적인 결함인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환각 현상)은 현장 적용의 걸림돌이다. AI가 도출한 결과물을 인간 전문가가 다시 검토하고 교정(Cross-check)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은 오히려 추가적인 인력과 시간을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업무의 속도는 일부 빨라졌을지언정, 오류를 수정하는 비용이 상쇄되면서 순생산성 증가는 제로(0)에 수렴하게 된다.
셋째, '재분배적 경쟁(Zero-Sum Game)'의 함정이다. 많은 기업이 AI를 도입하는 진정한 이유는 새로운 부나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경쟁사에게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방어적 목적’에 가깝다. 예컨대 모든 이커머스 기업이나 금융회사가 AI 마케팅 툴을 도입해 광고 문구와 디자인을 초고속으로 찍어낸다 하더라도, 전체 소비 시장의 파이가 커지지 않는다면 이는 기업 간의 마케팅 군비 경쟁에 불과하다. 개별 기업의 비용은 증가하지만 사회 전체의 부는 늘어나지 않는, 통계적 착시가 발생하는 것이다.

생산성의 정체는 금융시장에서 ‘거품론’이라는 냉혹한 심판으로 이어진다. 최근 월가의 대형 투자은행들과 경제 분석가들이 제기하는 AI 거품론의 핵심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빅테크가 투자하는 비용(Cost)에 비해, 자산 시장과 실물 경제가 거두어들이는 유료 매출(Revenue)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현재 AI 생태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축은 엔비디아의 GPU를 중심으로 한 인프라 구축이다. 하이퍼스케일러(대규모 클라우드 기업)들은 수조 원짜리 데이터센터를 짓기 위해 경쟁적으로 자금을 집행하고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계산해 보면, 이 막대한 인프라 투자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 기업과 소비자들이 AI 서비스에 지불하는 구독료나 사용료 매출이 매년 수천억 달러씩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오늘날 확고한 수익 모델을 증명한 서비스는 오픈AI의 챗GPT 구독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파일럿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일반 기업들은 AI 기술을 시범 도입(PoC)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비싼 라이선스 비용 대비 효율성이 낮다고 판단될 경우 언제든 지갑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다.이러한 비용과 수익의 불균형은 2000년 초반의 닷컴 버블을 연상시킨다. 당시에도 통신망 인프라와 광케이블을 까는 데 수천억 달러가 투입되었으나, 정작 그 위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킬러 콘텐츠’나 비즈니스 모델이 성숙하지 못해 수많은 IT 기업들이 연쇄 도산했다. 광케이블이라는 훌륭한 인프라가 넷플릭스나 구글 같은 진정한 디지털 거인을 탄생시키기까지는 그 후로도 1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지금의 AI 투자 사이클 역시 전방의 인프라 공급이 후방의 유효 수요를 과도하게 앞서 나간 ‘공급 과잉’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거품론자들의 엄중한 경고다.

글로벌 AI 패러독스와 거품론은 한국 경제에도 중대한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 경제는 최근 반도체 수출 호조에 힘입어 겉으로는 양호한 성장률 지표를 기록하고 있다.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AI 특수 메모리 반도체의 수요가 폭발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의 실적이 착시 효과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인프라 투자 사이클의 초입에서 얻는 일시적 반사이익일 수 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수익성 악화로 AI 투자를 축소하거나속도 조절에 나서는 순간, 한국의 반도체 수출은 직격탄을 맞게 된다. 따라서 하드웨어 공급망의 승리에 도취해 있을 것이 아니라, 국내 산업 전반의 AI 활용 능력을 극복하는 ‘실질적 생산성 제고’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결국 AI 생산성 패러독스를 깨고 거품론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AI가 모니터 속의 텍스트나 가상 세계의 코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인공지능이 실제 몸(Physical Body)을 입고 물류, 제조, 자율주행, 헬스케어 등 실물 경제의 가치사슬과 직접 결합하는 ‘피지컬 AI(Physical AI)’의 시대로 진화해야 한다. 공장의 제조 공정이 AI를 통해 스스로 최적화되고, 물류 창고의 로봇이 인간의 개입 없이 효율을 극대화하며, 신약 개발 기간이 수년에서 수일로 단축되는 등 ‘물리적 세계의 변화’가 가시화될 때 비로소 경제 통계상의 생산성 곡선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때야말로 투입된 자본이 진짜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성 폭발’의 시기가 될 것이며, 기술 거품론은 자연스럽게 소멸할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솔로 교수가 날카로운 독설을 남긴 지 약 10년이 지난 199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야 미국의 생산성이 연평균 2.5% 이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컴퓨터라는 하드웨어가 보급된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생산성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망이 전국적으로 확충되고, 이메일과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이 정착하며, 노동자들이 컴퓨터 기반의 업무 프로세스에 완전히 숙련되기까지 약 10~15년의 '문명적 시차(Time Lag)'가 필요했기 때문이다.과거의 역사는 우리에게 거품(Bubble)이 반드시 악(惡)은 아니었다는 교훈을 준다. 철도 버블이 미국의 전 대륙을 하나로 연결하는 물류망을 남겼고, 닷컴 버블이 전 세계를 초고속 인터넷망으로 묶었듯이, 현재의 AI 거품 논란 속에서 지어지는 거대한 데이터센터와 고성능 반도체 인프라는 설령 단기적인 투자 조정을 겪을지언정 미래 문명의 핵심 인프라로 남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AI 생산성 패러독스와 거품론은 기술이 인간의 삶과 산업 체제에 완전히 체화되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문명적 진통’이다. 오늘날 전 세계 경제학자들이 빅테크의 폭발적인 주가 랠리를 보면서도 회의론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현재의 AI 열풍이 40년 전 로버트 솔로가 경고했던 기술의 과잉 낙관과 거시경제적 성과 사이의 괴리가 그대로 재현되는 역사적 평행이론 구간이기 때문이다. 성급한 낙관론에 기대어 무차별적인 투자를 감행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단기적인 통계 정체를 이유로 기술의 근본적인 잠재력을 폄훼하는 회의론에 함몰되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다가올 시장의 변동성과 조정 국면을 견뎌낼 수 있는 기초체력(자본의 건전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AI 기술을 실물 산업의 효율성 개선으로 연결하는 구체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일이다. 거품이 걷히고 난 뒤 비로소 진짜 거인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산성 패러독스의 긴 터널을 뚫고 나올 기업과 국가만이 차세대 글로벌 경제 패권을 쥐게 될 것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