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본사, 중국 지사 소프트웨어 전면 차단 보복
베이징 "공급 중단 카드, 언제든 쓸 수 있다" 압박
베이징 "공급 중단 카드, 언제든 쓸 수 있다" 압박
이미지 확대보기자동차 한 대에는 수천 개의 반도체가 들어간다. 그 가운데 AI칩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빠지면 자동차가 아예 굴러가지 않는 부품들이 있다. 차량 전자제어장치(ECU)에 쓰이는 기초 마이크로프로세서가 그것이다. 넥스페리아는 바로 이 '조용하지만 필수적인' 반도체의 글로벌 핵심 공급자다. 2021년 차량용 반도체 품귀 사태 당시 전 세계 완성차 공장이 줄줄이 멈춰선 기억이 아직 생생한 업계는, 이번 사태를 그냥 '남의 집 집안싸움'으로 넘기지 못하고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필립스 DNA에 중국 자본이 덮친 기업
넥스페리아의 뿌리는 100년 역사의 유럽 전자 명가(名家) 필립스(Philips)에 닿아 있다. 반도체 사업부가 분사를 거듭하며 독립 법인으로 분화된 것이 넥스페리아다. 이 '유럽 기업'에 균열이 생긴 것은 2018년이다. 중국 전자 부품 제조업체 윙텍(Wingtech)이 넥스페리아를 전격 인수하면서, 등기상 본사는 암스테르담에 있지만 최대 주주는 베이징과 연결된 구조가 만들어졌다.
현재 윙텍의 지분 구조를 보면 중국 정부와 연계된 지분이 약 30%에 이른다. 외형은 유럽 기업, 내용물은 중국 자본인 이 기업은 한동안 '글로벌 공급망 효율화의 모범 사례'로 꼽혔다. 그러나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이 구조는 오히려 '시한폭탄'으로 돌변했다.
워싱턴의 전화 한 통이 암스테르담을 흔들었다
갈등의 첫 뇌관은 지난해 6월 워싱턴에서 당겨졌다. 미국 정부는 네덜란드 정부에 비공식 경로를 통해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넥스페리아가 미국 시장에 계속 제품을 판매하려면, 중국 국적 경영진 장쉐정(Zhang Xuezheng) 최고경영자를 해임해야 한다." 수출 시장을 잃을 수 없었던 네덜란드는 같은 해 9월 냉전 시대에 만들어진 국가안보 관련 법령을 근거로 넥스페리아의 경영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핵심 기술이 모기업 윙텍으로 무단 이전될 수 있다는 우려를 명분으로 삼았다.
중국의 반격은 신속했다. 광둥성 공장에서 생산하는 차량용 기초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수출을 일시 중단하는 '물량 카드'를 꺼낸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완성차 업체들은 즉각 공급 차질 가능성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네덜란드 경제부의 빈센트 카레만스(Vincent Karremans) 장관이 "공급망 안전이 확인됐다"며 통제 수위를 낮추면서 위기는 일단 봉합됐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 봉합이었다.
비밀번호 하나로 사무실을 마비시키다
지난 3일 암스테르담 본사는 중국 지사 전 직원의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계정에 대한 접근을 일괄 차단했다. 이메일도 안 열렸고, MS 워드도 실행되지 않았다. 사무용 소프트웨어가 전면 차단된 중국 지사의 사무실은 사실상 기능을 잃었다.
로이터 통신은 지난 6일(현지시각) 넥스페리아 본사가 소프트웨어 차단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본사 측은 같은 날 대부분의 계정을 복구하며 "생산 공정에는 영향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은 이를 단순한 시스템 오류로 보지 않는다. 정부 개입으로 경영권을 빼앗긴 본사가 지사를 향해 행사한 극단적 통제 수단, 즉 일종의 '디지털 응징'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반도체 공급망 전문 컨설팅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국경을 초월한 인수합병이 효율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그 구조 자체가 가장 위험한 리스크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며 "넥스페리아 사태는 지정학적 갈등이 이제 기업 내부 운영 시스템에까지 침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증 사례"라고 말했다.
자동차 업계 '초긴장'…한국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자동차공업협회(JAMA)는 지난해 네덜란드 정부가 넥스페리아 경영에 개입했을 당시 이미 공개 성명을 내고 "넥스페리아가 공급하는 기초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차량 전자제어장치(ECU)의 핵심 부품"이라며 "생산 차질이 현실화할 경우 세계 자동차 생산 전반에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한국 자동차 업계도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등 국내 완성차 제조사들은 ECU 부품 조달 과정에서 넥스페리아 계열 칩을 직·간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업계에서는 지금 당장 생산 차질이 생기는 상황은 아니지만, 사태가 장기화하거나 중국 정부가 실질적인 수출 통제에 나서면 2021년 반도체 쇼티지 때처럼 순식간에 위기로 전환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2021년 차량용 반도체 부족 사태 당시 전 세계 완성차 업체들은 수십조 원 규모의 생산 손실을 기록했다. 당시에는 팬데믹이라는 외부 충격이 원인이었다면, 이번에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라는 구조적 갈등이 '내부에서 폭발한 경우'라는 점에서 대응이 더 까다롭다는 분석이다.
베이징의 경고 "언제든 공급을 무기로 쓸 수 있다"
중국 상무부는 지난 7일 공식 성명을 통해 "네덜란드 측의 운영 방해 행위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중대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사태가 악화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네덜란드 측에 있다"고 압박 수위를 높였다. 외교적 수사에 익숙한 업계는 이를 "필요하다면 공급 중단이라는 카드를 언제든 꺼낼 수 있다"는 공개 경고로 읽는다.
지정학 리스크 분석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넥스페리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중국 자본이 유럽 기술 기업을 인수한 사례는 넥스페리아 외에도 수십 건에 이른다. 미·중 갈등이 심화할수록 이 기업들 각각이 잠재적인 '내전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셈이다.
넥스페리아 사태는 세계화의 역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국경을 초월한 자본 결합이 한때 '공급망 효율화'의 정답으로 여겨졌다면, 이제 그 구조 자체가 지정학적 뇌관으로 작동하는 시대가 됐다. 네덜란드 정부가 비밀번호를 잠그고, 베이징이 부품 박스를 잠그는 사이,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동차 공장이 멈출 수 있다. 반도체 공급망에서 '국적 불명'의 기업을 두는 비용이 얼마나 비싼지, 이번 사태는 전 세계 제조업에 다시 한번 청구서를 들이밀고 있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