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바닷물 끓여서 만드는 '자염(화염)' 아시나요?

공유
3

바닷물 끓여서 만드는 '자염(화염)' 아시나요?

[홍남일의 한국문화 이야기] '짠물'이 만든 세상

내 고향이 인천인 관계로 군에서나 사회에서 '인천 짠물'이란 소리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짠물하면 '맛이 짠 물'을 의미함에도 짠물 앞에 인천이 붙어서 '인천 짠물'하면 이때의 '짠물'은 '구두쇠처럼 야박한 놈'으로 뜻이 변합니다. 즉 맛이 짠 것이 아니라 야박해서 짠 것이고, 마시는 물이 아니라 '물건' 혹은 '놈'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뜻을 알면 다소 듣기 거북한 '인천 짠물'은 도대체 언제부터 무슨 까닭으로 생기게 되었을까요?

개항이 되자 항구에는 낯선 외국 상품은 물론 소금 같은 생필품도 다량 들어왔습니다. 소금은 주로 청나라에서 들어왔는데 수입 초기부터 상당한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의 소금보다 많게는 7~8배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청의 소금은 산에서 채취한 암염과 호수나 갯벌에서 태양열로 생성된 천일염으로 넓은 땅의 중국은 소금이 풍부했습니다.
반면 조선은 삼면이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동해안은 갯벌이 거의 없고, 남해안 갯벌은 폭이 좁았으며 그나마 서해안의 갯벌 환경은 최적이었지만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심해서 천일염 생산에 제약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조선은 수 세기 동안 독특한 방식으로 '자염(화염)'이란 소금을 생산하게 됩니다.

자염 생산 방법은 1차적으로 갯벌을 막아 바닷물을 채운 후 수 일 동안 태양열로 일정한 양을 증발시킨 후 염도가 높아진 남은 물을 육지로 운반하여 대형 가마솥에 담아서 소금결정체만 남을 때까지 불을 때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닷물을 끓여서 만들었다고 자염이라 하고 불로 얻었다고 해서 화염이라고도 부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염은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끓여내야 했기 때문에 연료비나 인건비가 많이 들어서 비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안 증도 태평염전이미지 확대보기
신안 증도 태평염전
이러한 상황에서 청의 소금이 속속 수입되자 전국 도처의 도매상들이 인천으로 몰려 왔으며 조금이라도 싸게 구입하려는 도매상들과 없어서 못 판다는 배짱의 인천 상인 사이에 흥정시비가 끊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상대적으로 비싸게 구입한 도매상인 사이에 볼멘소리가 떠나지 않았고 그 불만의 소리 중에 하나가 '인천 짠 놈' 혹은 '에이! 인천 짠물들' 하는 비아냥거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정설은 아니니까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분명한 것은 개항 후 인천에 청나라 천일염이 수입되면서 소금의 대량 소비가 가능해져 생활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먹거리에서 소금에 절인 젓갈류가 해안을 따라 지역 특산품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오늘날까지 명성을 구가하는 강화 새우젓과 밴댕이젓, 서산 어리굴젓, 송도 조개젓, 인천 곤쟁이젓, 추자 멸치젓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젓갈이 식단에 오르고 소금에 절인 각종 생선도 서민의 입맛을 당겼습니다.

청국소금이 날개 돋친 듯 팔리자 일본은 배가 아팠습니다. 사실 청국 소금이 들어 올 때 일본 소금도 있긴 했지만 일본 소금은 품질 면에서 청국소금 보다 월등히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비싸서 조선인에게 외면당했습니다. 더욱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나아가 국모시해 사건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반감은 소금을 포함한 일본 제품의 불매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조선인은 값 싼 청국 소금을 먹긴 했지만 청국소금은 제염 기술이 낮아 소금발도 굵고, 맛도 쓰며 색깔은 거무죽죽하여 늘 불만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간파한 일본 업자들은 자국 소금을 포기하고 청국 소금을 사서 그것을 다시 녹여 깨끗하고 입자가 고운 재제염(일명 꽃소금)을 만들어 국내에 선 보입니다. 이 소금이 일명 '꽃소금'이라 부르는 재제염입니다. 그러나 재제염 역시 초기 판매는 부진했습니다. 분명 차별화된 고급소금이었지만 여전히 가격이 문제였지요. 황금어장 같은 조선의 소금시장을 청으로부터 뺏으려는 일본의 시도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던 중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집니다. 이 시기의 조선은 이미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위한 전쟁 지원을 강요받게 됩니다. 일본은 막대한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에서 담배와 소금을 독점하고 전매제를 실시합니다만 결과는 또다시 실패였습니다. 조선인들이 담배와 소금소비를 급격히 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받은 배상금으로 다소 여유가 생기자 숙원 사업이었던 소금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이미 재제염으로도 청국 천일염을 당해 내지 못한 터라 아예 서해안에 천일염전을 조성할 계획을 세웁니다. 한마디로 청국 소금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낸 후 독점권을 행사하겠다는 속셈이었지요. 천일염 제조방법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염전을 축조하고 해수를 끌어들여 태양열과 풍력을 이용해 소금을 결정시키는 염법으로, 막대한 양의 바닷물을 원료로 사용할 수 있고, 특별한 기계설비와 많은 노동력도 들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청나라 기술자를 고용한 후, 인천 주안에 염전 1정보를 축조하여 시험해 본 결과 산출된 천일염이 중국보다 품질이 훨씬 좋아 그로부터 본격적인 생산채비를 갖추게 됩니다. 주안염전을 필두로 소래염전, 고잔염전, 시흥염전 등 서해안을 따라 도처에 염전을 축조하고 조선의 값 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엄청난 천일염을 생산했습니다. 이 결과 조선에서 청국소금은 사라졌고 일본은 물론 청국으로까지 소금 역수출을 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깁니다.
증도태평염전 1공구이미지 확대보기
증도태평염전 1공구
한편 일본이 서해 연안에 더 좋은 염전부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에 제일 먼저 염전을 만들게 된 이유는 우선 생산된 소금을 소비할 수 있는 큰 시장이 서울이었고 경인철도로 인해 신속한 물류가 가능했으며, 무엇보다도 항구를 통해 일본과 청나라로 반출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방 후 1960년대에 경인고속도로와 경인공단이 들어서기 전까지 인천 주변의 염전은 전국 판매량의 반을 훨씬 상회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참고로 지역마다 소금창고가 있었는데, 그 창고가 있던 곳이 지명으로 되어버린 곳으로 서울에는 염창동(소금창고)과 염리동(소금장사)이 있습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다시 돌아가서 1937년 일본은 인천과 수원을 잇는 수인선을 개통합니다. 열차는 전형적인 일본식 협궤 열차였는데 수송목적은 객차용이 아니라 화물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천에서 종착역 수원을 가는 사이에는 소래, 고잔, 남동, 시흥을 거치게 되는데 이 역 주변으로 대단위 소금 생산지가 산재하여 해당 역을 통해 소금을 수거할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수인선을 '소금열차'라고 불렀습니다. 이 소금열차는 1990년대에 사라지지만 이 열차로 인해 대표적인 명소가 탄생하는데 다름 아닌 인천 소래포구입니다.

소래포구는 소래역이 있었던 곳으로 주변에 큰 규모의 염전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포구를 통해 각종 해산물이 들어오면 염전의 소금으로 해산물을 절여서 젓갈로 가공하는 젓갈공장이 즐비했고 여기서 생산된 젓갈은 다시 수인선을 통해 전국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지금은 염전도 수인선도 멈춘 지 오래지만 포구의 명성은 아직도 이어져, 전국의 이름난 젓갈이 모여들고 덩달아 각종 싱싱한 해산물도 풍성함을 더 하면서 평일에도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