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제조 기업 ASML은 2025년 매출 전망을 시장의 기존 예상보다 낮춘 300억~350억 유로로 발표했다.
ASML 발표는 반도체 산업이 AI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기업들의 IT 투자가 AI 서버와 관련 인프라에 집중되면서 전통적 PC와 스마트폰 시장은 상대적으로 침체기를 겪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기적 현상이 아닌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전환으로 보인다. AI 기술 발전과 함께 데이터 처리 능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와 특화된 AI 칩에 대한 수요가 계속 증가할 전망이다. 반면, 일반 소비자용 전자기기 시장은 AI 기술 도입에 따른 혁신적 변화가 아직 가시화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저조한 성장세를 보인다.
이러한 산업구조의 변화는 투자 흐름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ASML의 실적 발표 이후 시장의 초기 반응은 전반적으로 매도세였으나, 곧 AI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반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투자자들이 단기적 충격을 넘어 장기적인 산업 트렌드를 주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AI 혁명이 가져온 이 변화는 반도체 기업에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전통적인 반도체 기업들은 AI 시대에 맞는 제품 포트폴리오 재편과 기술 혁신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반면, AI 특화 기업들에는 시장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열리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도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의 강세를 바탕으로 AI 시대에 걸맞은 전략적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술 개발과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TSMC의 파운드리 시장 지배력에 비해 아직 격차가 존재한다. TSMC가 AI 칩 생산에 선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만큼, 한국 기업들은 기술 혁신과 생산 능력 확대로 이 격차를 좁히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반드시 승자독식의 구도로 이어질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AI 기술의 발전 속도와 응용 분야의 확대에 따라 시장 구도는 계속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전통적인 반도체 기업들의 기술력과 생산 능력이 AI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산업 전반의 균형 있는 발전 가능성도 여전히 살아있다.
한편, 이러한 산업구조의 변화는 국가 간 기술 패권 경쟁과도 맞물려 있다. AI 반도체 기술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각국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규제가 산업 발전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 가능성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ASML 실적 쇼크는 AI 시대 전환이 가져온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변화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는 기업의 실적 문제를 넘어 기술 혁신, 투자 흐름, 국제 정세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거시적 변화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 기업들에도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AI 시대의 급격한 수요 증가로 인해 반도체 공급망 다변화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으며, 이는 한국 기업들에 새로운 시장 진입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또한 메모리 반도체 기술에서의 우위를 AI 특화 칩 개발로 확장하는 전략적 접근이 가능하다. 한국 정부의 K-반도체 전략 등 정책적 지원과 맞물려 한국 기업들이 AI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반도체 기업들은 이러한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면서 지속가능한 성장 전략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한국 기업은 기존 강점을 살리면서도 AI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는 혁신적 접근이 요구된다.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는 이러한 도전과 기회에 대한 대응에 달려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