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디코드] 日 업은 마이크론, 히로시마에 2조엔 'AI 반도체 요새' 짓는다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Micron Technology)가 일본 히로시마를 글로벌 AI 반도체 패권 경쟁의 전초기지로 낙점했다. 단순한 생산 라인 증설이 아니다. 일본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과 ASML 등 장비 업계의 후방 지원을 결합해 차세대 메모리 기술의 '요새'를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폭증하는 인공지능(AI) 칩 수요에 대응하려는 마이크론과 '반도체 부활'을 꿈꾸는 일본 정부의 이해관계가 2조 엔(약 18조 원) 규모의 거대 프로젝트로 구체화됐다.

26일(현지시각) 닛케이(Nikkei)와 디지타임스(DIGITIMES)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히로시마 생산 거점의 D램(DRAM) 개발 및 양산 역량을 대폭 강화한다. 핵심은 범용 제품을 넘어선 고부가가치 AI 메모리 생산 체제의 확립이다.


이번 투자는 미·일 반도체 동맹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매니시 바티아(Manish Bhatia) 마이크론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는 규슈 인근 히로시마 사업장이 향후 다세대(multiple generations) 첨단 D램 제조를 담당하는 '핵심 센터(critical center)'가 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히로시마 공장이 단순 팹(Fab)을 넘어, 고도화된 메모리 기술의 글로벌 허브로 격상된다는 의미다.
투입 자본은 매머드급이다. 2023년부터 투자를 지속해 온 마이크론은 히로시마 플랜트에 총 2조 엔(약 129억2000만 달러)을 쏟아붓는다. 일본 경제산업성(METI)은 즉각 화답했다. 마이크론에 7745억 엔 규모의 보조금 지급을 승인한 것이다. 전체 투자액의 40%에 육박하는 금액을 정부가 대는 구조다. 이는 개별 기업 유치를 넘어, 국가 안보 차원에서 첨단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내에 묶어두려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NHK와 닛케이 보도를 종합하면, 마이크론의 로드맵은 치밀하다. 2029 회계연도(2030년 3월 종료)까지 히로시마에 1조 5000억 엔이 집중 투입된다. 투자가 완료되면 히로시마 공장의 첨단 D램 월간 생산 능력(CAPA)은 웨이퍼 기준 4만 장 수준으로 도약한다.

양산 일정표도 구체적이다. 2026년 차세대 공정 도입을 시작으로, 2028년 6~8월 사이 차세대 칩 초도 물량을 출하한다. 이후 수율 안정화와 램프업(생산량 증대)을 거쳐 2030년 3~5월경 완전 가동(Full production capacity) 체제에 돌입한다. 향후 5년 내 글로벌 메모리 시장 판도를 흔들 물량이 일본 본토에서 쏟아져 나오게 된다.


경제산업성이 외국 기업에 혈세를 투입하는 명분은 '공급망 내재화'다. 일본 정부는 마이크론이 생산 원자재의 80%를 일본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점을 높이 샀다. 마이크론의 성장이 곧 일본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의 매출 증대로 직결되는 구조다.
여기에 고용 창출 효과도 한몫했다. 마이크론이 일본 내 인력 채용과 훈련에 주력한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일본 정부는 마이크론이라는 거대 앵커 기업을 통해 자국 반도체 생태계 전반을 강화하는 실리적 '윈-윈(Win-Win)' 전략을 택했다.


기술적 하이라이트는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도입이다. 마이크론은 최근 히로시마 공장에 반도체 미세 공정의 핵심인 EUV 장비를 반입했다. 이 장비는 2026년부터 '1감마(1γ)' 세대 D램 생산 라인에 투입된다.

1감마 공정은 마이크론의 미래가 걸린 승부처다. 이 공정에서 생산된 칩은 AI 가속기 시장의 필수재인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지원한다. 히로시마 공장이 엔비디아(NVIDIA) 등 빅테크가 요구하는 고성능 메모리의 핵심 공급처로 부상한다는 뜻이다. 범용 D램 시장의 불황을 넘어 고부가가치 AI 시장을 선점하려는 마이크론의 기술적 야심이 읽히는 대목이다.


마이크론의 확장에 협력사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세계 유일의 EUV 장비 공급사 네덜란드 ASML은 일본 내 운영 능력을 공격적으로 확장 중이다. 히가시히로시마의 예비 부품 창고 규모를 두 배로 늘렸고, 현장 유지보수 팀 인력도 대폭 보강했다.

이는 단순 확장이 아니다. 2025년 추가 도입될 EUV 시스템에 대비해 배송부터 유지보수까지 완벽한 지원 체계를 갖추겠다는 포석이다. ASML의 인프라 확장은 마이크론 히로시마 공장의 가동 안정성을 담보하는 핵심 퍼즐이다. 마이크론, 일본 정부, 글로벌 장비사가 맞물린 ‘히로시마 모델’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