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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퍼스트'의 칼날, WTO 심장을 겨누다… 28년 디지털 무관세 시대 막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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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퍼스트'의 칼날, WTO 심장을 겨누다… 28년 디지털 무관세 시대 막 내려

미국, 브라질·터키에 막혀 전자상거래 관세 유예 연장 무산… 다자무역 체제 최대 균열
美 독자 디지털 동맹 구축 선언… 한국 포함 66개국 복수국 협정으로 새 판 짜기
카메룬 야운데의 WTO 각료회의. 사진=연합뉴스. 이미지 확대보기
카메룬 야운데의 WTO 각료회의. 사진=연합뉴스.

인터넷이 막 세상에 펼쳐지던 1998년, 세계 각국은 "디지털 무역만큼은 관세 없이 키워보자"며 손을 맞잡았다. 그 약속이 28년 만에 처음으로 깨졌다. 미국 정부는 이 실패를 세계무역기구(WTO)의 사망 선고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단순한 외교적 결렬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다자무역 체제를 공개적으로 내팽개치고 '뜻 맞는 나라끼리' 새 질서를 짜겠다고 선언한 역사적 전환점이다.

로이터 통신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각)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카메룬 수도 야운데에서 나흘간 열린 WTO 제14차 각료회의(MC14)는 브라질과 터키의 반대로 전자상거래 관세 유예 연장안을 채택하지 못한 채 결렬됐다.

이번 각료회의 결렬로 1998년 채택 이후 28년간 이어져 온 전자 전송물 관세 유예 조치가 처음으로 만료됐다.

"협상장에서 '결과가 따를 것' 경고했다"… 美의 승부수


이번 회의에서 미국 측 협상 전략의 핵심은 전자상거래 관세 유예 조치의 영구 연장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한 외교관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장기적 유예 연장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결과가 따를 것"이라는 발언으로 다른 대표단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협상은 막판까지 엎치락뒤치락했다. 외교관들은 브라질이 처음 제안한 2년 연장안과 영구 연장을 원한 미국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1년 유예 조항이 붙은 4년 연장 초안을 마련하며 일요일 내내 협상 테이블을 지켰다.

브라질이 이후 중간 검토 조항을 넣은 4년 연장안을 내놓았으나 충분한 지지를 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그리어 대표는 회의 종료 뒤 약 24시간이 지나 공개 성명을 내고 쐐기를 박았다. "나는 WTO의 가치에 항상 회의적이었고, 이번 주 회의는 이 기구가 앞으로 글로벌 무역 정책에서 제한적인 역할만 하게 될 것임을 확인해줬다"고 밝혔다. 이어 "많은 회원국이 통상장관조차 야운데(Yaoundé)에 보내지 않았다"며 개혁 의지 부재를 정면 비판했다.
그는 또 "미국은 수십 개국, 사실상 거의 모든 주요 교역 상대국으로부터 미국의 디지털 전송물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이미 확보했다"며 "WTO 밖에서 관심 있는 모든 파트너와 함께 목표를 관철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브라질의 '농업 카드'가 디지털 무역을 인질로 잡다


이번 결렬의 이면에는 신흥국과 선진국 사이의 묵은 갈등이 깔려있다.

힌리치 재단의 무역 분석가이자 전 WTO 이사인 키스 록웰은 브라질이 전자상거래 유예 조치를 농업 분야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협상 카드로 활용하려 했으나, 미국이 더 이상 WTO에 그만큼 투자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전략 자체가 효력을 잃었다고 진단했다.

그는 "예전이라면 미국이 시스템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고 받아들였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번 결렬이 한국에도 직접적인 파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야운데 각료회의에 참석한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전자상거래협정이 조속히 이행되면 디지털 무역 환경의 법적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이 높아져 중소기업에도 디지털 무역의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은 이번 회의에서 일본·호주·싱가포르·EU·중국 등과 함께 66개국 전자상거래협정 임시 이행 선언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복수국 간 협정은 WTO 다자 체제의 빈자리를 온전히 메우기엔 역부족이라는 게 통상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앞서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각료회의를 앞두고 발표한 'WTO 개혁 보고서'에서 한국·싱가포르·브라질·코스타리카 등 4개국이 스스로 선언한 개발도상국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직접 지적해 통상 갈등의 새로운 뇌관이 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WTO 없는 디지털 무역'… '스파게티 볼' 시대 열리나


국제상업회의소(ICC)의 앤드루 윌슨 사무차장은 이번 결과를 두고 "WTO 체제 토대에 또 하나의 균열이 생겼다"고 밝히며, 각국이 디지털 서비스에 새로운 과세를 부과하기 전에 유예 조치를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영국의 피터 카일 상무·무역부 장관도 이번 결과를 "글로벌 무역에 중대한 차질"로 규정했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12개국(호주·영국·캐나다·일본·멕시코 등, 미국은 불포함)은 WTO 회의 무대 옆에서 유럽연합(EU)과 별도로 협의를 진행했다.

제네바 무역 플랫폼의 드미트리 그로조우빈스키 사무총장은 양자 및 복수국 협정이 혼재할 경우 복잡한 '스파게티 볼' 형태의 협정 난립 위험이 생긴다고 경고했다.

WTO 사무총장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는 유예 조치의 복원 가능성을 열어두고 브라질·미국 간 협의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보조금 투명성 강화, 의사결정 절차 개선 등 현안은 오는 5월 제네바에서 이어지는 회의로 넘어갔다.

국제 통상질서는 지금 분수령을 맞고 있다. WTO 다자 체제가 균열을 드러낸 자리를 미국 주도의 복수국 간 디지털 동맹이 채워나갈지, 아니면 각국이 저마다의 이해에 따라 뒤엉킨 '스파게티 볼' 질서 속으로 빠져들지는 앞으로 수개월 안에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세계 10위권 수출 강국이자 디지털 콘텐츠·서비스 분야의 성장세가 두드러진 한국으로서는 어느 진영의 협정 틀 안에 자리를 잡느냐가 미래 디지털 통상의 판도를 가를 핵심 변수가 됐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