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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금보험 위기, 2008년보다 심각…사모대출 1조 달러 '폭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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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금보험 위기, 2008년보다 심각…사모대출 1조 달러 '폭탄' 되나

A.M. 베스트 "신용등급 2단계 하락·자본 완충 축소"…국민연금도 8조 원 노출
아폴로·KKR 인수 보험사, 비공개 자산 4190억 달러…재무부 긴급 실태조사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의 뉴욕증권거래소 앞.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의 뉴욕증권거래소 앞. 사진=연합뉴스
노후 소득을 보장한다고 팔린 상품이, 정작 팔린 돈을 어떻게 굴리는지 아무도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 미국에서 그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미국 보험업계 전문 신용평가사 A.M. 베스트(A.M. Best)는 10일(현지시각) 발표한 보고서 "연금 준비금의 신용품질, 2007년 대비 2025년 신용등급 기준 하락(Credit Quality of Annuity Reserves Declined from 2007 to 2025)"에서, 연금보험사들의 투자 포트폴리오가 2008~2009년 금융위기 이전보다 더 위험한 구조로 변질됐다고 경고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10일(현지시각) 이 보고서를 집중 조명하며 미국 은퇴자 노후자금이 전례 없는 위기에 노출됐다고 보도했다.

등급은 내려앉고, 쿠션은 얇아졌다…'조용한 부실화'의 민낯
A.M. 베스트의 에릭 밀러(Erik Miller) 수석이사는 "우리는 2007년보다 현저히 나쁜 상태"라며 "보험금을 지급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단언했다. 구체적 수치가 그 말을 뒷받침한다.

연금 준비금이 담보하는 자산의 신용등급은 금융위기 이전보다 평균 2단계 낮아졌으며, 재보험 의존도 심화, 재보험 자산 품질 저하, 재무 유연성 약화, 자산 건전성 악화 등이 겹치며 복합적인 하방 압력을 만들어냈다.

지난 10년 사이 연금보험 판매가 두 배 늘면서 개인연금 준비금 규모는 약 1조 6000억 달러(약 2370조 원)에 불렀다. 개인 생명보험 준비금 규모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미국 은퇴연구센터(Center for Retirement Research)에 따르면 미국 고령층 10명 중 1명꼴로 이 상품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이 준비금이 어디에 투자됐느냐다. 미국 생명·연금보험사들의 사모대출 보유액은 2024년 한 해에만 6% 더 불어났으며, 지난 10년 사이 규모가 두 배로 커졌다.

AM Best A.M. 베스트 집계 기준으로 총 투자 자산 약 6조 달러(약 8900조 원) 가운데 사모대출이 1조 달러(약 1480조 원)에 육박한다. 사모대출이란 은행 대출이나 공모채가 아닌, 비은행 기관이 비상장 기업에 직접 공급하는 대출로 수익률이 높은 대신 시가평가가 불가능하고 유동성이 극히 제한된다.
이 가운데 약 4190억 달러(약 622조 원)어치는 발행사와 투자자만 내용을 알 수 있는 이른바 '비공개 신용등급' 자산이다. 시장 전반에는 아무것도 공개되지 않는 '검은 상자'가 준비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셈이다.

아폴로·KKR이 보험사를 삼킨 이유…수익 극대화의 이면

이 구조의 설계자는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Apollo Global Management), KKR 등 대형 사모운용사들이다. 이들은 보험사를 직접 인수한 뒤 거액의 사모대출 자산을 포트폴리오에 편입했다.

보험사는 높은 수익률로 계약자 이율을 높일 수 있고, 운용사는 운용보수를 거둬들이는 구조다. 겉으로는 상호 이익처럼 보이지만, 아랫단에서 대출이 부실화되면 타격이 고스란히 연금 준비금으로 전달된다.

사모운용사와 연계된 보험사의 경우 '관계자 투자'(운용사가 소유·통제하는 회사에서 매입한 자산) 비중이 회사 잉여금의 평균 76%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모운용사의 보험 시장 장악력은 2011년 2%에서 현재 20%까지 치솟았다.

국제금융센터는 지난해 9월 트리컬러스(Tricolors)·퍼스트 브랜즈(First Brands) 등 중소·중견기업 파산에 이어 올해 1월에도 블랙록·아폴로 등 주요 사모대출 운용사들이 일부 대출 부실로 손실을 입으면서 사모대출에 대한 우려가 확대됐다고 밝혔다.

사모대출 시장은 부도율 과소평가, 내부 모델 기반 자산가치 산정의 투명성 부족, 금융기관과의 연결고리 심화 등 잠재 위험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Oxford Economics)의 하비에르 코로미나스(Javier Corominas) 글로벌 거시전략 책임자는 "민간 신용 시장에서 이미 단계적 위기의 초기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며 "지금 당장이 아닐 수 있지만, 3개월이나 6개월 안에 문제가 드러날 수 있다"고 밝혔다.

안드로메다 캐피털 매니지먼트(Andromeda Capital Management)의 알베르토 갈로(Alberto Gallo) 최고투자책임자는 "상자 안에 기업 100개가 있는데 10개는 이미 죽은 고양이다.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지금 그들이 만들어낸 구조"라고 꼬집었다.

국민연금도 8조 원 노출…한국 기관투자자 발등의 불


이 문제는 태평양 건너 남의 일이 아니다. 해외 사모대출에 투자한 국내 연기금·공제회 등 주요 기관투자자들이 최근 미국 사모대출펀드의 환매 중단 사례가 잇따르자 시장 점검에 나선 상태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국민연금의 사모대출 투자 규모는 7조 8600억 원 수준이다.

최근 블룸버그에 따르면 사모대출 펀드 전반에서 환매 요청이 급증하면서 약 460억 달러(약 68조 원) 규모의 자금이 환매 제한에 묶인 상태다.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 아레스 매니지먼트(Ares Management), 블랙록(BlackRock), 모건 스탠리(Morgan Stanley) 등 주요 운용사들이 잇따라 환매 제한에 나서면서 시장 경계감이 높아지고 있다.

금융계 전문가는 "사모대출펀드 부실 사태가 기관투자자들에게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도 "국내 기관들은 블랙스톤, KKR 등 대형 운용사 중심으로 투자하고 있고 사모대출 비중도 전체 포트폴리오 대비 제한적이어서 치명적인 수준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재무부는 주 보험감독관들과 '최근 시장 동향, 부상하는 위험, 위험 관리 관행'을 주제로 일련의 면담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보험감독관협의회(NAIC)는 "보험사들이 위험 수준에 맞는 자본을 유지하도록 감독해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규제 당국은 항상 지난번 위기를 막는 데 집중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2008년 위기의 진원지는 은행이었고 파국은 빠르게 드러났다. 이번엔 보험사가 진원지이고 부실은 시가평가 없는 비유동 자산 구조 탓에 오랫동안 수면 아래 숨어있다가 한꺼번에 터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경고다.

미국 고령층 10명 중 1명의 노후자금이 걸린 문제인 동시에, 국민연금을 포함한 국내 기관투자자들이 주시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