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세계는 또 한 번의 거대한 지정학적 단층선이 파열되는 파열음을 듣고 있다. 최근 개최된 미중 정상회담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흘러나온 발언들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를 넘어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동아시아 안보 질서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대만에 대한 미국의 무기 판매를 중국과 논의할 수 있으며, 나아가 무기 판매를 중단할 수도 있다는 그의 암시는 1982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이래 44년간 미국 대만 정책의 신성불가침한 성역으로 여겨졌던 ‘6대 보장(Six Assurances)’의 사실상 폐기를 의미한다.
서방 진영은 경악했다. 반면 베이징은 쾌재를 불렀다. 타이베이는 깊은 침묵과 공포에 빠졌다. 과연 트럼프는 왜 44년 만에 대만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안보 보장을 협상 테이블 위로 던져버렸는가? 그리고 이는 시진핑 주석의 대만 무력 침공을 현실화하는 서곡이 될 것인가? 1979년 지미 카터 행정부가 중국과 수교하며 대만과 단교했을 때, 미국 의회는 대만의 안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만관계법(TRA)’을 제정했다. 그러나 1982년, 미중 양국이 미국의 대만 무기 판매를 점진적으로 줄인다는 내용의 ‘제3차 공동성명(8.17 성명)’을 발표하자 대만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이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대만을 안심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그러나 확고하게 전달한 것이 바로 ‘6대 보장’이다.
그 핵심은 명확하다. 미국은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 종료 시한을 정하지 않으며, 무기 판매와 관련해 중국과 ‘사전 협의(Consult)’를 하지 않고, 대만과 중국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지 않으며, 대만에 중국과 협상하도록 압력을 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대만이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힘을 미국의 주도하에 제공하되, 그 과정에서 중국의 간섭을 철저히 배제하겠다는 최후의 안전장치였다. 이 6대 보장이 있었기에 대만은 중국의 끝없는 무력 통일 위협 속에서도 아시아의 경제 기적이자 반도체 심장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 방파제를 스스로 허물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왜 이토록 위험한 결정을 내렸는가? 첫째, 트럼프의 머릿속에 각인된 ‘극단적 거래주의(Extreme Transactionalism)’ 때문으로 보인다. 그에게 외교는 가치와 이념의 연대가 아니라, 대차대조표로 득실을 따지는 비즈니스다. 트럼프의 시각에서 대만은 미국으로부터 9,500마일 떨어져 있고 중국으로부터는 불과 68마일 떨어진 섬이다. 지정학적으로 방어하기 극도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막대한 군사적 비용이 소모되는 ‘적자 사업’이다. 트럼프는 대만이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훔쳐 갔다"는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왔다. 그에게 대만은 피를 흘리며 지켜야 할 민주주의의 보루가 아니라, 미국의 제조업을 쇠퇴시킨 부유한 무임승차자에 가깝다.
둘째 이유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에 입각한 ‘거대한 거래(Grand Bargain)’의 다목적 카드다. 현재 미국 경제는 고물가와 재정 적자, 보호무역주의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트럼프는 시진핑과의 담판에서 대만의 안보를 담보로 내어주고, 그 대가로 미국에 유리한 거대한 무역 양보, 미국 국채의 안정적 매입, 혹은 펜타닐 밀수 차단 등 국내 정치에 즉각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어내려 하는 것이다. 즉, 대만의 지정학적 가치를 현찰로 환전하려는 시도다.셋째, 글로벌 패권 유지 비용에 대한 트럼프 미국의 피로감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중동의 불안정이 지속되는 가운데, 미국이 아시아에서 중국과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빚는 것은 공멸이라는 공포가 미국 내 고립주의자들 사이에 퍼져 있다. 트럼프는 대만을 지키기 위해 제3차 세계대전의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대만의 운명을 방기하고 방위선을 괌이나 하와이, 혹은 일본으로 후퇴시키는 ‘신(新)애치슨 라인’을 긋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트럼프의 6대 보장 포기 시사는 시진핑 주석에게 일생일대의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그동안 미국 정보당국은 중국이 당장 2026년이나 2027년에 전면적인 대만 침공을 감행할 가능성은 작으며, 평화적 통일 여건을 조성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분석해 왔다. 미군의 압도적인 무력 개입과 경제 제재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 의지가 꺾이고, 대만에 대한 무기 공급마저 중단된다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이제 중국은 과거처럼 피 흘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식의 전면전(D-Day Invasion)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졌다. 미국의 지원이 끊긴 대만을 향해 해상 및 공중 봉쇄(Blockade), 사이버 공격을 통한 전력망 마비, 제한적인 미사일 타격 등 이른바 ‘강압적 병합(Coercive Annexation)’ 전략을 구사할 것이다. 대만의 생명선인 에너지 수입 항구를 틀어막고 "미국은 오지 않는다, 항복하라"는 심리전을 펼치면, 고립무원의 대만은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 베이징의 계산이다. 트럼프 측근들조차 "향후 5년 내 대만 침공(혹은 강압 통일) 가능성이 급격히 커졌다"고 우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트럼프의 발언은 침략자의 오판을 부르는 가장 위험한 촉매제가 되었다.
대만의 몰락은 단순한 작은 섬나라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만이 중국의 손에 넘어간다는 것은 서태평양의 제해권이 중국으로 넘어감을 의미한다. 이는 일본의 해상 교통로(시레인)가 중국의 통제하에 놓이게 됨을 뜻하며, 결국 한미일 안보 협력 체제의 근간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더 나아가, 전 세계 첨단 반도체의 60%, 최고급 인공지능(AI) 칩의 90% 이상을 생산하는 TSMC가 중국 공산당의 수중에 떨어진다.
트럼프 행정부는 보조금을 주어 미국 내에 반도체 공장을 짓게 하면 된다고 보고 있다. 오판 이다. 수십 년간 축적된 대만의 반도체 생태계와 인적 자본은 단기간에 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이 TSMC를 장악하면 글로벌 디지털 경제와 4차 산업혁명의 목줄을 쥐게 되며, 이는 미국 패권의 돌이킬 수 없는 쇠퇴를 확정 짓는 치명타가 될 것이다.
동맹의 가치를 비용으로 환산하는 트럼프의 미국, 그리고 힘의 공백을 노려 영토 팽창을 시도하는 시진핑의 중국. 우리는 지금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의 약육강식 논리가 21세기 첨단 기술의 외피를 쓰고 귀환한 정글의 한복판에 서 있다. 대만의 위기는 결코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둘러싼 압박이나, 북한의 핵 위협 앞에서도 미국이 언제든 한국과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섬뜩한 전례가 대만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미국의 확장억제 약속만을 맹신하던 시대는 끝났다. 맹목적인 친미나 반중의 이념적 틀에서 벗어나, 철저한 국익 중심의 ‘실용적 생존 외교’로 전환해야 한다. 독자적인 비대칭 군사 억지력을 극대화하여 우리를 건드리면 침략자도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본다는 ‘고슴도치 전략’을 완성해야 하며, 무너져가는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대체 불가능한 기술적 우위를 확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트럼프가 찢어버린 것은 단순한 44년 전의 종이 쪼가리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라는 신화의 파기 선언이다. 거대한 폭풍이 동북아시아로 몰려오고 있다. 스스로를 돕지 않는 자, 살아남을 수 없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가 우리 앞에 도래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