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반도체·AI 규제 균열… 車 부품사 숨통 트였으나 토종 AI 투자 한파 우려

글로벌이코노믹

반도체·AI 규제 균열… 車 부품사 숨통 트였으나 토종 AI 투자 한파 우려

대중 제재 수주 만에 후퇴한 유럽·AI 규제 당일 연기한 트럼프… 공급망 불확실성 재점화
자동차 부품사 차량용 칩 수급 한숨 돌렸으나 국내 AI 스타트업 투자 심리는 냉각 우려
유럽연합(EU)과 미국이 같은 날 반도체와 인공지능(AI) 규제를 동시에 후퇴했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유럽연합(EU)과 미국이 같은 날 반도체와 인공지능(AI) 규제를 동시에 후퇴했다. 이미지=제미나이3

유럽연합(EU)과 미국의 반도체와 인공지능(AI) 규제가 같은 날 동시에 후퇴했다.

EU가 중국산 반도체 제재를 발표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일시 해제를 검토하고 나선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준비된 AI 규제 행정명령 서명을 전격 보류했다. 두 사건은 서방의 거대 지정학 전략이 자국 산업의 비용 부담이라는 현실 벽에 부딪혀 동시에 유턴하기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대중 규제의 부메랑은 단기적으로 국내 자동차 부품업계의 칩 수급 숨통을 틔웠으나, 거대 모델 규제 불확실성을 키워 국내 AI 스타트업 진영의 투자 심리를 위축시키는 파장을 낳을 수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21(현지시각) 보도에서 EU 집행위원회가 중국 반도체 제조사 '양주 양지에 전자기술(Yangzhou Yangjie Electronic Technology)'에 대한 제재를 일시적으로 해제하는 방안을 이르면 이번 주에 제안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월스트리트저널(WSJ)도 트럼프 대통령이 과도한 규제가 기술 혁신을 가로막고 중국과의 안보 경쟁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며 당초 예정된 AI 감독 행정명령 서명을 전격 연기했다고 전했다.

완성차 압박에 규제 후퇴한 EU… 현대·기아 협력사 공급망 직결

EU 집행위원회의 이번 조치는 유럽 완성차 기업들의 거센 압박에 굴복한 결과다. 글로벌 소형 신호용 이산반도체(Discrete) 시장에서 약 10%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양지에 전자는 지난 4월 러시아에 이중용도 부품을 공급했다는 이유로 EU20차 제재 대상에 오랐다. 그러나 제재 직후 유럽 자동차 업계는 전력 제어용 레거시(구형) 공정 칩의 대체 공급처를 찾지 못해 통상 2~3주에 불과한 완성차 공장 내 부품 재고가 고갈되고 라인이 멈출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럽 완성차 업계의 위기는 고스란히 국내 자동차 부품업계로 전이된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에 협력하는 국내 주요 부품사들은 유럽발 차량용 칩 공급망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지난해 말 중국계 반도체 기업 넥스페리아의 경영권 분쟁으로 네덜란드 공장 가동이 중단되자, 베이징 당국이 보복성으로 넥스페리아 중국 법인의 수출을 막아 글로벌 차량용 칩 품귀 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국내 부품사들도 전력 제어용 레거시 칩을 구하지 못해 납품 차질을 겪었다.

국내 자동차 부품업계에서는 양지에 전자의 제재가 몇 개월간 유예되면서 당장 최악의 레거시 칩 쇼크는 피하게 됐지만, EU의 제재 기조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대체 공급망 다변화를 서둘러야 하는 숙제는 여전하다고 현 상황을 진단한다.

트럼프 AI 규제 당일 연기… 규제 공백 속 빅테크 인프라 쏠림


미국 워싱턴에서는 AI 안보 전선이 흔들리며 글로벌 자금 흐름의 대이동을 예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기자들과 만나 "행정명령이 미국 기술 발전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며 중국과의 AI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지키기 위해 서명을 보류했다고 말했다. 취소된 행정명령은 빅테크 기업이 고성능 AI 모델을 출시하기 전 정부에 사전 시연하도록 강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번 보류로 규제 장벽이 사라진 미국 인프라 및 파운데이션 모델 기업으로의 자금 쏠림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데이비드 삭스 등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VC) 출신 친기업파의 의견이 관철되면서, 엔비디아를 필두로 한 GPU 생태계와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하이퍼스케일러의 그래픽처리장치(GPU) 투자는 제약 없이 확장될 동력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자금은 인프라(GPU·클라우드)로 쏠리고, 응용 중심 스타트업은 상대적 투자 매력도가 낮아지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반면 정부 주도의 강력한 방화벽을 주장해 온 JD 밴스 부통령과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 등 국가안보파는 한발 물러서게 됐다. 당초 백악관은 앤스로픽의 최신 AI 모델 '미토스(Mythos)'와 오픈AI의 차세대 모델이 사이버 공격 취약점을 가려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을 우려해 규제 장치를 마련하려 했다.

토종 AI 생태계의 부메랑… 독자 모델 고립과 밸류에이션 하락


미국의 AI 규제 유턴은 오픈AI와 앤스로픽의 거대 모델 개발 경쟁에 다시 불을 붙이는 반면, 글로벌 VC 자금의 아시아 투자를 막아 국내 AI 스타트업 생태계에는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 빅테크의 규제 공백 속 독주 체제가 굳어지면 거대언어모델(LLM)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토종 AI 기업들은 미국 메이저 기업의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에 종속될 위험이 커진다.

이러한 기술적 종속은 국내 스타트업의 자생력을 떨어뜨려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심각한 '밸류에이션 디스카운트(기업가치 저평가)'로 이어진다. 미국 빅테크가 규제 없이 시장을 선점할수록 국내 기업의 차별성이 희석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투자금 회수 경로인 기업공개(IPO)나 인수합병(M&A) 기대감이 약화되면서 국내 VC들마저 AI 스타트업에 대한 신규 투자를 줄이고 보수적인 자금 운용으로 돌어설 수 있다.

증권가에서는 규제 완화로 미국 빅테크의 시장 지배력이 더 공고해졌으며, 독자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없는 국내 AI 기업들은 투자 유치가 갈수록 어려워질 것으로 분석한다.

단기 유예와 중장기 불확실성… 투자자가 주시해야 할 3대 지표


서방 진영의 AI·반도체 전략 동시 균열은 각국 정부의 규제 기조가 시장의 현실적 한계와 충돌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번 사태가 국내 산업계에 미칠 파장을 가늠하기 위해 투자자와 업계 관계자들은 향후 세 가지 지표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첫째, EU 27개 회원국의 제재 유예 최종 승인 여부다. 집행위의 일시 해제 제안이 회원국 전체 동의를 얻어야 공급망 정상화와 재충격의 분기점을 가를 수 있다.

둘째, 미국 백악관 내부의 AI 정책 주도권 향방이다. 친기업파와 국가안보파의 대립 속에서 향후 최종 가이드라인의 수위가 결정되므로 리스크 예측의 핵심 지표다.

셋째, 차량용 레거시 칩의 글로벌 단가 및 재고 추이다. AI 메모리 수요 폭발로 구형 공정 라인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전력 반도체 가격 변동성은 자동차 생산 차질을 유추하는 선행지표다.

글로벌 지정학적 규제는 더 이상 고정된 상수가 아니며 자국 산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변수가 됐다. 정부 정책의 일관성이 무너진 지금, 기업과 투자자들은 글로벌 공급망과 투자 포지션을 동시에 재점검해야 하는 구간에 진입했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