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한명호의 미술 에세이 ⑦ 예술가의 붓질, 영혼을 흔드는 맹렬한 주술과 부적

글로벌이코노믹

한명호의 미술 에세이 ⑦ 예술가의 붓질, 영혼을 흔드는 맹렬한 주술과 부적

Chanting in flowers. 2026이미지 확대보기
Chanting in flowers. 2026
음악은 영혼을 옭아매는 주문이고, 그림은 가슴에 새기는 부적입니다.

아주 오래전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미국의 토니 브랙스톤(Toni Braxton)을 가뿐히 뛰어넘어, 가슴을 때리는 영적인 울림이 그 목소리엔 있었습니다. 음정도 박자도 단 한 줄의 가사조차 떠오르지 않지만, 그 가수의 이름만은 생생합니다. ‘쿨’의 이재훈이었습니다. 그가 그 어떤 심연의 슬픔과 감동으로 노래를 부른 건지는 알 길 없으나, 그 찰나의 감동만큼은 내 가슴 한구석에, 지금도 지독한 한 주문인 양 남아 울립니다. 당시의 나에겐 그 어떤 아멘, 할렐루야보다 더 간절하고도 진실 된 구원 그 자체였습니다.

까까머리 학창 시절, 낡은 미술 교과서에서 마주한 폴 클레(Paul Klee)의 한 점의 수채화, 푸른 삼각형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였던 작디작은 화면의 충격은, 훗날 잭슨 플록과 빌렘 데쿠닝의 웅장한 폭발을 맞닥뜨리기 전까지, 한 장의 부적처럼 내 머릿속에 새겨졌습니다.

그림만이 갖는 진실성이란 한 인간의 영혼에 벼락같은 충격으로 내리꽂히고, 전 생애를 가로지르는 본능적 찬양이자 주술이 됩니다.
그러니 모름지기 그림이란 화가 자신의 피와 살 내음이 온전히 배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는 당사자가 여하하든, 심지어 마약이나 알코올에 찌들었든, 세상 잣대로서 성 소수자이든 상관없습니다. 캔버스 위에서만큼은 남김없이 헐벗은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면 그만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난 바젤리츠가 비난했던 미니멀적이고 개념적인 예술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현시점의 현대 예술이 이토록 맹렬히 타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샌프란시스코 뒷골목을 전전하던 히피들과 비트 제너레이션 문학 세대 그리고 각양각색의 음악가 등 세상 반항적 이단아들이 쏟아낸 날것의 에너지 덕분일 테니까요.

어느 순간 키스 해링과 장 미셸 바스키아, 앤디 워홀 같은 이들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미술은 가볍고 자유롭지만, 나는 피 흘리고 있어’라며, 우리 깊숙이 지독한 주문을 걸어놓고 훌쩍 사라져 갔습니다. 비록 찰나였다지만, 그들이 열어젖힌 새롭고 독창적인 우주는, 우리의 영혼 깊숙이 ‘예술의 궁극은 자기 파멸’일지도 모른다는 경종을 남겼습니다.

지금 이곳 우리가 캔버스 앞에서 손에 쥔 붓의 무게를 느낀다면, 그러한 파국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일 테지요.
Incantation. 소리를 그린다는 것은 소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본다는 사실은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2026이미지 확대보기
Incantation. 소리를 그린다는 것은 소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본다는 사실은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2026
Chanting on Forest. 숲속의 고요함은 그 소리가 나즈막하기 때문이고작은 소리의 큰 떨림으로 눈부신 것이다. 2026이미지 확대보기
Chanting on Forest. 숲속의 고요함은 그 소리가 나즈막하기 때문이고작은 소리의 큰 떨림으로 눈부신 것이다. 2026
Incantation. 2026이미지 확대보기
Incantation. 2026

대중가요의 세계에선 노래 한 소절, 멜로디 한 줌만 베껴도 그 예술혼을 훔친 파렴치한으로 사회적 지탄을 엄중히 받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옆 동네 미술로 건너오면 한없이 자유롭고도 때로 턱없이 무책임합니다.

조안 미첼(Joan Mitchell)의 자유로운 붓질이나 아실 고키(Arshile Gorky), 마크 로스코의 흔적을 교묘히 닮아 낸 모양과 색감들이, 다른 무수한 화가들의 캔버스 위에서 버젓이 베껴져도, 누구 하나 얼굴 붉히거나 나무라지조차 않습니다.

똑같은 한 송이 꽃을 각기 다른 다섯의 화가가 보고 그린다면, 제각각 다른 빛깔, 다른 형용의 꽃이 필 것이고, 만일 엇비슷해 보일지라도, 그 꽃은 화가 각자의 영혼을 통과해 낸 다른 ‘꽃’ 그림이 맞습니다.

허나 앞선 다른 화가가 먼저 그린 꽃의 모양새와 색채, 붓질까지 고스란히 누군가가 베껴 그린다면 그것은 복제화입니다. 하지만 베끼더라도 작가가 의도적으로 조금만 변형시킨다면 그 작품은 오리지널리티를 인정받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바젤리츠의 화법은 가히 혁명적입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누구나 바젤리츠는 될 수 없고, 화면 위의 독창성이 될 천재적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화가라면 누구라도 자기만의 독창적인 화면 세계를 꿈꾸며 삽니다.

미국의 거대 자본과 산업 문화가 독식해 버린 현대 미술사는, 수많은 유사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을 양산합니다. 그들은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잭슨 플록과, 빌렘 데쿠닝, 조안 미첼의 거대한 그늘을 단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선구자들은 시대가 던지는 낯설고 두려운 문화적 충격을 오로지 맨몸의 살이 찢기는 고통으로 견디며, 혼신으로 붓을 휘둘렀습니다. 피와 땀으로만 엉긴 그 맹렬한 진정성이야말로, 보는 이로 하여금 부적처럼 가슴으로 새기게 하고, 영혼으로 뒤흔드는 주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작품은 마땅한 고독이며,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견될 수 없습니다.

화면 위의 그 독창성이 버거운 현대의 무수한 미술가들은, 평면을 팽개치고, 보다 그럴듯한 입체적 조형 실험으로 뛰어듭니다. 안타깝게도 세상 달콤한 영광과 자본은 그럼에도 그들의 손을 들어주는 데 앞다툽니다.

그 속에 누군가의 그림이 설혹 과거의 어떤 그림과 닮아 손가락질받더라도, 현학적이고 정교한 비평가들을 방패 삼는다면 굳이 돌을 맞을 일조차 없습니다. 어차피 영혼 없이 엇비슷한 그림들이야 차고 넘치니, 스스로를 발 빠르게 브랜드로 포장하여, 상업 자본과 결탁할 뿐인 장사꾼들의 독식이 작금 비참한 미술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로 이재훈의 노래처럼, 폴 클레의 한 폭 수채화처럼, 심장을 멎는 주술 같은 기적을 마주하곤 합니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야말로 더더욱 빛나는 진정성과 가치를 놓치고 싶지 않은 작은 소망으로서 말입니다.

만약 종교가 가슴 뜨거운 찬양과 주문을 제한다면, 그 길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모두가 자기 앞의 벽만 바라보며 침묵하는 수행에만 갇힌다면 우리의 숨통은 누가 틔어줄까요.

예술이 고요 속의 뼈를 깎는 수행이라면, 한편 미친 듯 피를 토해내는 굿판이기도 합니다. 단 한 명이라도 헐벗은 영혼에 지독한 주문을 걸어, 평생 떨칠 수 없는 서늘한 부적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나는 예술가입니다.

캔버스 앞에서 앓는 이 고단한 붓질은, 나를 허무는 맹렬한 굿이자, 나를 오롯이 세우는 지극한 수행입니다.

한명호(서양화가)이미지 확대보기
한명호(서양화가)

글쓴이/ 한명호(1957년생)/ 홍익대 서양화과 및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박영덕화랑. 박여숙화랑. 현대아트갤러리. 갤러리Q, 부산화랑 등 다수), 단체전 및 국제전(화랑미술제-현대화랑, 북경아트페어-아트사이드갤러리 등), 최우수예술가상 미술부문 수상(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저서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화가’ 등 다수


한명호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