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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은 90세, 자산은 75세… ‘장수 오판’이 노후 자금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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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은 90세, 자산은 75세… ‘장수 오판’이 노후 자금 삼킨다

기대수명 과소평가하는 '장수 문해력' 부족, 노후 빈곤의 핵심 요인
한국 65세 기대여명 21.5년… 은퇴 기간 30년 자산 설계 재구축해야
수익률 아닌 기간 싸움… 공적연금 기반 위에 연금형·투자자산 분산 필요
은퇴를 앞두거나 이미 직장에서 물러난 자산가들이 일선 금융권의 자산관리 센터를 찾을 때 가장 공통으로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은퇴를 앞두거나 이미 직장에서 물러난 자산가들이 일선 금융권의 자산관리 센터를 찾을 때 가장 공통으로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이미지=제미나이3

은퇴를 앞두거나 이미 직장에서 물러난 자산가들이 일선 금융권의 자산관리 센터를 찾을 때 가장 공통으로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내가 모은 돈이 내 수명보다 먼저 바닥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이다.

평생 성실하게 자산을 축적한 이들이 정작 밤잠을 설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전 세대보다 훨씬 오래 생존해 자신이 모아둔 은퇴 자금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른바 '장수 위험(Longevity Risk)' 때문이다. 과거에는 100세 생존이 일부의 기적이었으나, 이제는 자산관리의 기본 설계 기준이 됐다.

은퇴 자산 4층 구조. 도표=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은퇴 자산 4층 구조. 도표=글로벌이코노믹

장수 문해력 부족이 저축 공백 부른다


미국 교직원퇴직연금기금(TIAA) 연구소와 글로벌 금융 문해력 우수센터가 공동 발간한 '2026년 개인금융 이해도 조사 보고서'는 자산 수명을 인지하는 '장수 문해력(Longevity Literacy)' 부족이 은퇴 보안을 위협하는 근본 요인이라고 짚었다.

65세 미국 성인이 90세 이상 생존할 확률은 33.3%에 달하지만, 밀레니얼 세대 중 은퇴 기간을 30년 이상으로 길게 예상한 비율은 26%에 불과했다. 4명 중 3명이 자신의 노후 자금 소요 기간을 오판하고 있는 셈이다.

자신의 생존 기간을 짧게 잡은 은퇴 준비자들은 상대적으로 저축액을 줄이고 금융 자문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돈을 굴리는 법인 금융 문해력만 배우고, 얼마나 오래 써야 하는지 보여주는 장수 문해력을 계산하지 못해 스스로 금융 취약성을 키우는 구조다.

한국형 은퇴 설계, '4% ' 맹신은 위험


이러한 장수 오판은 한국 시장에서 한층 부담스러운 결과로 이어진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생명표'를 보면 대한민국 65세 인구의 평균 기대여명은 21.5년으로 10년 전보다 1.6년 늘었다.

대다수 은퇴자가 자신의 수명을 75세 전후로 가정하고 자금 인출 계획을 세우지만, 실제로는 90세에 육박하거나 이를 웃돌 확률이 매우 높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자산 고갈 위험은 노후 생활 안정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특히 미국 금융업계에서 통용되는 '4% '을 한국 시장에 그대로 적용하는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 첫해에 은퇴 자산의 4%를 인출하고 이후 매년 물가상승률을 감안해 인출하는 이 방식은 미국의 과거 고성장, 고금리 시대와 주식, 채권 시장의 역사 성과를 기반으로 도출됐다.

저성장과 저금리 기조가 고착화되고 시장 변동성이 높은 한국 환경에서는 안전 인출률을 3%에서 3.5% 안팎으로 낮춰 잡아야 안전하다. 보수 성향 투자자라면 3% 이하가 합당하다.

실제 은퇴 자산 5억 원을 보유한 은퇴자가 연 복리 3%로 자산을 운용하며 매년 초기 자산의 4%인 연 2000만 원씩 인출한다고 가정하면, 자산은 약 23년 만에 완전히 고갈된다. 65세에 은퇴해 88세가 되는 시점에 잔고가 바닥날 수 있다.

만약 이 은퇴자가 95세까지 살아간다면 마지막 7년 동안 아무런 소득도 없이 가파른 소득 공백 상태를 견뎌야 한다. 안전 인출률을 연 1500만 원에서 1750만 원 수준으로 낮추지 않으면 자산 고갈 시점은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온다.

현장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은퇴 자산 방어 전략


시중은행의 한 고위 자산관리 전문가는 초고령화 시대의 은퇴 설계가 수익률을 몇 퍼센트 더 올리느냐가 아니라 자산의 지속 기간을 수명만큼 늘리는 싸움이라고 강조한다. 장수 리스크를 방어하기 위해 자산관리 현장에서는 자산 연금화와 투자 효율성을 결합한 다각도의 상품 포트폴리오를 제안하고 있다.

우선 자산의 일정 부분을 즉시 납입해 평생 연금을 수령하는 즉시연금과 일정 연령 이후부터 지급이 개시되는 지연 연금을 조합하는 전략이 있다. 이를 통해 노년 후반기에 발생할 수 있는 소득 공백을 효과적으로 메울 수 있다.

이와 함께 은퇴 시점에 맞춰 위험자산 비중을 알아서 줄여주는 타깃데이트펀드(TDF)나 주기적인 배당 수익을 주는 인컴펀드를 활용해 자산의 변동성을 제어한다.

최근 퇴직연금(IRP) 계좌 내에서는 투자 수익률이 하락하더라도 평생 일정 수준의 최소 인출액을 보장받아 자산 고갈 시점을 늦추는 최저인출보증(GLWB) 연금 상품도 주목받는 추세다.

균형 잡힌 노후를 위한 4층 방어벽 구축


다만 금융 상품 중심의 해법에는 명확한 맹점이 존재한다. 연금형 상품은 장기적인 물가 상승에 따른 화폐가치 하락 위험을 방어하기 어렵고, 중도 해지할 때 유동성 제한과 수수료 부담이 크다.

전문가들이 특정 상품에 자산을 전부 넣기보다 공적연금을 주축으로 삼고 자산을 다층으로 분산하는 방어벽 포트폴리오를 추천하는 이유다.

가장 먼저 1층에는 물가상승률이 반영되어 기본 소득 기반을 마련해 주는 국민연금 같은 공적연금을 배치해야 한다. 그다음 2층에는 전체 은퇴 자산의 20%에서 40% 범위를 즉시연금이나 최저인출보증 연금으로 구성해 장수 위험에 대응하는 종신 인컴 구조를 확보한다.

3층에는 주식이나 상장지수펀드(ETF)를 포함한 투자자산을 배치해 자산을 성장시킴으로써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방어한다. 마지막 4층에는 2년에서 5년 치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여 시장 폭락 시 위험자산을 강제로 매도해야 하는 상황을 막는 완충재로 삼는다.

데이비드 네이슨 전 미국 재무부 차관보는 개인의 노후 금융 부실이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소비 위축, 국가 건강보험 재정 압박, 사회복지 비용 폭증으로 이어져 경제 전체를 뒤흔든다며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미래를 위해 저축하지 않는다. 기업 퇴직연금 설계자와 정책 당국은 근로자가 자신의 은퇴 설계 지평을 30년 이상으로 넓힐 수 있도록 장수 문해력 교육을 제도화해야 한다. 길어진 수명에 발맞춘 정교한 자산 설계도가 시급한 시점이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