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지금 세계 경제는 잔혹한 시험대에 올라 있다. 연초 발발한 중동발 이란전쟁의 포화는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했고, 이는 전 세계적인 에너지 폭등과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거대한 재앙의 파도로 돌아왔다. 이 미증유의 위기 속에서 라가르드는 다시 한번 유로존의 키를 잡고 전격적인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유럽 경제가 심각한 위협을 받는 환경은 아니다"라며 만장일치로 긴축을 이끌어낸 그의 결단력은, 그를 향해 '유럽의 수호신'이라는 찬사와 '경기 침체를 부추기는 독단가'라는 비판을 동시에 쏟아내게 만든다.
라가르드에게 이러한 극단의 평가는 낯설지 않다. 그는 프랑스 재무장관으로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방어했고, 최초의 여성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로서 유로존 재정위기의 소방수 역할을 자처했으며, 이제는 ECB 총재로서 유로화의 가치를 수호하고 있다. 그의 발자취는 언제나 '최초'라는 수식어와 함께했으며, 그가 걸어온 길 자체가 현대 글로벌 금융 외교의 역사였다. 변호사 출신의 비(非)경제학자가 어떻게 세계 경제의 차르(Tzar)가 되었는지, 그 장엄한 인물 스토리와 업적, 그리고 그를 둘러싼 빛과 그림자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크리스틴 라가르드의 본명은 크리스틴 마들렌 오디트 랄루에트이다. 그는 1956년 1월 1일, 프랑스 파리의 유서 깊은 학자 집안에서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루앙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문학과 지성이 흐르는 가정환경은 어린 라가르드에게 정교한 언어적 감각과 논리적 사고를 심어주었다. 불행히도 그가 16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 홀로 네 자녀를 키워야 하는 경제적 시련이 찾아왔지만, 이 시기는 오히려 라가르드를 정신적으로 조기에 성숙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197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1년간 교환학생 프로그램(AFS)을 통해 메릴랜드주의 홀턴-암스 학교를 다녔다. 이 시기 그는 미 의회 국회의원인 윌리엄 코헨의 의원실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미국 정계의 역동성을 생생하게 목격했고, 완벽한 영어 구사 능력을 체득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파리 제10대학교(나테르) 법대에 진학하여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며 엘리트 법조인으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프랑스의 최고 엘리트 코스인 국립행정학교(ENA) 입학시험에서 두 차례 낙방하는 좌절을 겪기도 했으나, 이 실패는 그를 프랑스 관료 사회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글로벌 무대로 눈을 돌리게 만든 전화위복이 되었다.
1981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라가르드는 세계적인 미국계 대형 로펌인 '베이커 앤 맥켄지(Baker & McKenzie)' 파리 지사에 입사했다. 당시 프랑스 법조계는 여전히 보수적이었고, 여성 변호사에게 중요한 기업 인수합병(M&A)이나 독점금지법 사건을 맡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입사 면접 당시 "여성은 파트너(동업자)로 승진할 수 없다"는 차별적인 발언을 듣기도 했으나, 라가르드는 실력으로 전면 돌파를 시도했다. 그는 타협을 모르는 워커홀릭이었다. 기업 노동법과 반독점법 분야에서 탁월한 승소율을 기록하며 로펌 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무기는 프랑스적인 논리성과 미국적인 실용주의의 결합, 그리고 상대를 설득하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1995년 여성 최초로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마침내 1999년에는 베이커 앤 맥켄지 50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이사회 의장(글로벌 대표)으로 선출되었다. 시카고 본사로 거처를 옮긴 그는 전 세계 60개국이 넘는 지사, 수천 명의 변호사를 지휘하며 글로벌 경영 감각을 익혔다. 로펌을 이끄는 동안 매출을 크게 신장시키며 경영자로서의 수완도 입증했다. 2002년에는 월스트리트 저널이 선정한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 기업인' 5위에 오르며, 이미 법조와 경영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다.
미국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던 라가르드에게 고국의 부름이 찾아온 것은 2005년이었다. 당시 도미니크 드 빌팽 프랑스 총리는 라가르드를 통상장관으로 임명했다.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던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의 등장이었지만, 그는 특유의 외교력으로 프랑스의 수출 시장을 개척하고 노동 시장 규제 완화를 추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정치적 정점은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시작되었다. 사르코지는 라가르드를 농업수산부 장관을 거쳐,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여성 경제재정산업부(재무장관) 장관으로 임명했다. G8(주요 8개국) 국가 중 최초의 여성 재무장관이라는 타이틀이었다.
2011년 5월, 국제 금융계는 거대한 스캔들로 뒤흔들렸다. 유력한 차기 프랑스 대통령 후보이자 IMF 총재였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이 뉴욕의 한 호텔에서 성추문 사건으로 전격 사퇴한 것이다.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 유로존 국가들이 연쇄 부도 위기에 처한 '유로존 재정위기'의 한복판에서 사령탑이 사라진 IMF는 대혼란에 빠졌다. 위기의 순간, 세계는 다시 한번 라가르드를 주목했다. 유럽 국가들은 물론, 미국의 지지까지 확보한 그는 2011년 7월, IMF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재로 취임했다. 라가르드가 마주한 IMF의 현실은 가혹했다. 유럽 재정위기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거대 경제권으로 전염될 기세였고, 신흥국들은 유럽에만 특혜를 준다며 IMF의 구제금융 정책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라가르드는 취임하자마자 특유의 '포용적 리더십'과 '터프한 협상력'을 동시에 발휘했다.
라가르드는 IMF,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B), 유럽중앙은행(ECB)으로 구성된 이른바 '트로이카'의 핵심 축으로서 그리스 재정위기 협상을 이끌었다. 그는 그리스 정부에는 고통스러운 구조조정과 재정 긴축을 요구하는 한편, 완고한 독일 등 채권국들을 향해서는 그리스의 부채를 탕감(헤어컷)해 주어야만 궁극적인 해결이 가능하다며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 국민들로부터 냉혹한 마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그는 유로존 붕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서구 중심의 IMF 권력 구조를 개편하는 데도 기여했다. 중국, 브라질, 인도 등 신흥 경제국의 발언권을 높이기 위해 지분(쿼터) 개혁을 추진했고, 2016년에는 중국 위안화를 IMF의 특별인출권(SDR) 통화바스켓에 편입시키는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해 IMF는 '선진국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진정한 글로벌 금융 기구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할 수 있었다.
경제학자가 아닌 법조인 출신이었던 그는 오히려 경제를 보다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IMF 총재로서 '성 평등'과 '소득 불평등 완화'가 단순히 윤리적 문제가 아닌,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임을 강조했다. 노동 시장에서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 GDP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이른바 '위머노믹스'를 적극적으로 전파하며, 보수적인 IMF 보고서에 기후변화와 불평등 이슈를 공식 의제로 올렸다.그는 탁월한 성과를 바탕으로 2016년 연임에 성공하며, 8년 동안 세계 경제의 최고 중재자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2019년 11월, 라가르드는 또 하나의 유리 천장을 깨뜨렸다. 마리오 드라기 전 총재의 뒤를 이어 유럽 경제의 통화 주권을 쥔 유럽중앙은행(ECB)의 제4대 총재이자 최초의 여성 총재로 취임한 것이다. 중앙은행 총재는 으레 정통 경제학 학위를 가진 통화이론가들이 맡아왔던 관행을 깬 파격적인 인사였다. 시장은 그가 드라기가 남긴 '완화적 통화정책(양적완화)'의 유산을 어떻게 통제할지 의구심을 품고 주시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의 커리어는 화려한 성공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를 향한 비판의 시선 역시 날카롭다. '유럽의 수호신'이라는 찬사의 이면에는 기술관료적 독단과 정치적 논란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라가르드의 명성에 가장 큰 오점을 남긴 사건은 프랑스 재무장관 시절 발생한 '타피 스캔들'이다. 프랑스의 사업가이자 사르코지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베르나르 타피가 아디다스 매각 과정에서 주정부 소유 은행과 분쟁을 겪자, 라가르드는 이를 법원이 아닌 사적 중재위원회로 넘겼다. 그 결과 타피는 2008년 4억 400여만 유로(약 5,000억 원)라는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챙겼다.이 결정은 특혜 논란을 불렀고, 라가르드는 권한 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프랑스 공직자 특별재판소에 기소되었다. 2016년 재판부는 그에게 직무유기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다만 그의 명성과 위기관리 공로를 참작해 '형벌 및 전과 기록은 면제'하는 기묘한 판결을 내렸다. 비록 실형은 면했으나 법을 수호해야 할 변호사 출신 장관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혀 국가 재정에 손실을 내는 데 방조했다는 도덕적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통 경제학 학위가 없다는 점은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이는 정교한 통화정책 메시지로 시장과 소통해야 하는 ECB 총재 자리에서 때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코로나19 초기 기자회견에서 그는 "우리는 이탈리아 국채 금리 격차(스프레드)를 좁히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던졌다. 이 한마디에 이탈리아 국채 가격은 폭락했고 시장은 공황에 빠졌다. ECB가 유로존 취약국을 방치할 수 있다는 신호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라가르드가 신속히 사과하고 진화에 나섰으나, 시장은 그가 정통 중앙은행가들에 비해 통화정책의 민감성을 정교하게 다루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그의 커리어 중 가장 험난한 고개를 넘고 있다. 지난 2월 발발한 이란전쟁은 글로벌 공급망을 무너뜨렸고, 유로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3.2%까지 끌어올렸다. 이는 ECB의 중기 목표치인 2.0%를 한참 상회하는 수치다. 반면 유로존의 1분기 GDP 성장률은 -0.2%를 기록하며 경기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가 동시에 오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공포다.이 상황에서 라가르드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2026년 6월 11일, ECB는 3대 정책금리를 0.25%p씩 전격 인상했다. 2023년 9월 이후 2년 9개월 만의 긴축 복귀이자, 이란전쟁 이후 G7 경제권 중 최초의 금리 인상 단행이다. 이번 결정을 두고 시장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한편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실기(失期)했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선제적이고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고 호평한다. 만장일치로 금리 인상을 이끌어낸 그의 리더십이 전쟁의 불확실성을 돌파하는 방패가 될 것이라는 시각이다.
반대편의 시각은 냉혹하다. 베렌베르크 은행의 홀거 슈미딩을 비롯한 경제 전문가들은 "이번 금리 인상은 수요 과열이 아닌 공급 부족으로 인한 물가 상승에 대한 잘못된 처방이며, 이란전쟁으로 가뜩이나 위축된 유로존 경제에 심각한 역풍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물가는 잡지 못하고 경기 침체만 가속화할 것이라는 비관론이다.라가르드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단호하다. 그는 금리 인상 직후 "유로존 경제가 심각한 위협을 받는 환경은 아니며, 이번 결정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한 보험성 인상"이라고 응수했다. 물가가 2027년 하반기에나 안정될 것이라는 솔직한 전망을 내놓으면서도, 국방 및 인프라 부문의 공공투자가 경기를 지탱할 것이라는 정교한 경제적 방어 논리를 펼쳤다.
크리스틴 라가르드의 삶은 도전과 수성(守城)의 연속이었다. 남성 중심의 글로벌 로펌에서 최고 권좌에 올랐고, 프랑스 재무부와 IMF, 그리고 ECB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나온 모든 자리에는 '최초의 여성'이라는 찬란한 훈장과 함께 '위기 극복의 사령관'이라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졌다.그는 정통 학파들이 중시하는 복잡한 경제 수식이나 화폐 이론가들의 교조주의에 갇히지 않는다. 대신 뛰어난 정무적 감각과 협상력, 그리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흩어진 이해관계를 하나로 묶어내는 '정치 경제학적 리더십'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타피 스캔들과 같은 도덕적 결점이나 통화정책 소통에서의 세련미 부족이라는 그림자가 존재하지만, 위기 순간마다 대담한 대책으로 시스템의 붕괴를 막아낸 그의 공로는 부인할 수 없다.이란전쟁의 불길 속에서 라가르드가 내린 금리 인상 카드는 과연 유럽 경제를 구원할 신의 한 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으로 인도하는 패착이 될 것인가. 역사의 평가는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