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서 열린 유럽중앙은행 포럼서 “변화 없다” 강조
2% 물가 목표 재확인했지만 시장은 인플레 완화 발언에 안도
2% 물가 목표 재확인했지만 시장은 인플레 완화 발언에 안도
이미지 확대보기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낮은 금리를 공개적으로 요구해온 가운데 새 연준 의장이 국제 무대에서 중앙은행 독립성과 2% 물가 목표를 동시에 못박은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워시 의장은 최근 인플레이션 위험이 낮아졌다고도 언급해 시장은 트럼프의 발언을 다소 완화적으로 받아들였다.
2일(이하 현지 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워시 의장은 전날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유럽중앙은행(ECB) 연례 중앙은행 포럼에 참석한 자리에서 연준 독립성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트럼프 압박 속 독립성 공개 선언
워시 의장의 이 같은 발언은 취임 한 달여 만에 나온 두 번째 공개 행보다.
그는 제롬 파월 전 의장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중앙은행 수장이 됐다. 파월 전 의장은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금리를 충분히 낮추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공개 비판을 받았다.
워시 역시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취임 전부터 연준 독립성을 둘러싼 의구심을 받았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워시가 백악관의 뜻에 지나치게 끌려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워시 의장은 취임 뒤 첫 기자회견부터 예상보다 강한 물가 안정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미국 국민에게 부담이 되는 문제로 규정하며 연준이 이를 낮추는 데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신트라 발언은 그 연장선에 있다는 분석이다. 워시 의장은 연준이 2%를 넘는 인플레이션을 용인할 것이라고 가계와 기업, 금융시장이 생각한다면 실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가 안정 목표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메시지다.
◇ 2% 물가 목표 재확인
워시 의장은 2% 인플레이션 목표를 유지하겠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미국 인플레이션은 이란 전쟁 이후 에너지 가격 급등의 영향으로 5월 4.2%까지 올라 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후 유가가 안정되면서 물가 압력은 다소 낮아졌지만, 연준 목표치와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워시 의장은 인공지능(AI)이 장기적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도 언급했지만, 현재 주변을 보면 물가가 여전히 높다고 지적했다. AI가 중장기적으로 공급 능력을 키울 수 있더라도 단기 통화정책의 초점은 물가 안정이라는 뜻이다.
이 발언은 워시 체제의 연준이 트럼프 대통령의 금리 인하 요구와 일정한 거리를 두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트럼프는 경기 부양과 차입 비용 절감을 위해 낮은 금리를 선호하지만 연준이 물가 목표를 앞세우면 단기 금리 인하는 쉽지 않다.
시장에서는 한때 워시가 트럼프 대통령의 지명자라는 점 때문에 더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펼칠 가능성을 예상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오히려 연준이 이르면 10월 금리를 올릴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 금리 전망은 끝까지 말 아껴
워시 의장은 구체적인 금리 경로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는 이달 말 예정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를 올릴 수 있느냐는 질문에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4주 뒤 회의에서 위원들이 문을 닫고 치열하게 토론할 것이라고만 밝혔다.
이는 워시가 강조해온 ‘덜 말하는 연준’ 기조와 맞닿아 있다. 그는 취임 전부터 연준이 시장에 너무 많은 신호를 주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시장이 경제지표보다 연준 인사들의 발언과 점도표, 포워드 가이던스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문제의식이다.
포워드 가이던스는 중앙은행이 향후 금리 경로를 미리 안내하는 소통 방식이다. 금융위기 이후 주요 중앙은행들은 시장 기대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 도구를 적극 활용했다. 그러나 워시는 이런 방식이 연준을 스스로 묶고 시장의 자율적 판단을 흐릴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지난달 첫 FOMC에서도 분기별 금리 전망인 점도표에 자신의 전망치를 제출하지 않았다. 신트라 발언에서도 금리 인상 여부를 예고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 시장은 완화적 대목에 반응
흥미로운 점은 시장 반응이다.
워시 의장은 독립성과 물가 안정을 강하게 말했지만 시장은 그의 발언 가운데 인플레이션 위험이 최근 낮아졌다는 대목에 더 주목했다. 그는 최근 4주 동안 인플레이션 기대와 위험이 내려갔다고 설명했다.
이 발언 뒤 미국 국채금리와 달러는 하락했다. 특히 금리 전망에 민감한 2년물 미국 국채 수익률은 하루 기준 0.03%포인트 내린 4.14%를 기록했다.
시장 참가자들은 워시의 전체 메시지는 매파적이지만, 최근 물가 압력이 완화됐다는 평가가 금리 인상 시점을 늦출 수 있다고 해석했다. 직전 FOMC 이후 시장 포지션이 이미 긴축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작은 완화 신호에도 채권 금리가 반응한 것으로 풀이된다.
워시 체제의 연준을 둘러싼 시장 해석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투자자들은 그가 얼마나 강하게 물가를 잡으려 하는지, 동시에 실제 지표가 누그러질 때 얼마나 유연하게 움직일지를 가늠하고 있다.
◇ 리사 쿡 판결엔 언급 피해
워시 의장은 리사 쿡 연준 이사 관련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도 언급을 피했다.
최근 미국 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쿡 이사를 해임하지 못하도록 막는 결정을 내렸다. 이 사안은 연준 이사의 임기와 중앙은행 독립성을 둘러싼 중요한 법적 쟁점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워시 의장은 해당 판결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았다. 정치적 논란에 직접 뛰어들기보다 통화정책과 물가 안정에 초점을 맞추려는 태도로 해석된다.
그는 금리 결정도 공개 석상에서 미리 말할 문제가 아니라 FOMC 내부 토론을 거쳐 정할 사안이라는 점을 반복했다. 연준 독립성을 강조하면서도 불필요한 정치적 발언은 피한 것이다.
◇ 워시식 연준의 핵심은 ‘독립성과 침묵’
워시 의장의 신트라 발언은 새 연준 체제의 방향을 비교적 분명히 보여준다.
첫째, 연준 독립성은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금리 인하 요구가 있더라도 연준은 2% 물가 목표를 기준으로 움직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둘째, 연준은 말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워시는 시장이 원하는 방식으로 금리 경로를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점도표와 포워드 가이던스에 익숙했던 월가에는 적지 않은 변화다.
셋째, 데이터에 따라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높다는 점은 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두지만, 최근 물가 위험이 낮아졌다는 평가는 긴축 속도를 조절할 여지를 남긴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작동하면서 시장은 워시의 발언을 단순한 매파 또는 비둘기파로 나누기 어려워졌다. 독립성과 물가 목표는 강하게 말하지만, 금리 경로는 말하지 않고, 최근 지표 변화에는 유연하게 반응하는 방식이다.
◇ 덜 친절한 연준에 적응해야 하는 시장
FT에 따르면 워시 체제의 연준은 파월 시대보다 덜 친절한 중앙은행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파월 전 의장 시절 연준은 기자회견, 점도표, 성명문, 의사록을 통해 시장과 꾸준히 대화했다. 이는 불확실성을 낮추는 장점이 있었지만, 연준이 잘못된 판단을 했을 때 시장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쏠리는 부작용도 있었다.
워시는 이 틀을 흔들고 있다. 그는 중앙은행이 너무 많은 말을 하기보다 경제지표와 내부 토론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본다. 시장은 앞으로 연준의 사전 신호보다 실제 물가, 고용, 에너지 가격, 생산성 지표를 더 직접적으로 읽어야 할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연준이 말을 줄이면 시장 변동성은 오히려 커질 수 있다. 공식 설명이 줄어들수록 투자자들은 짧은 문장 하나, 공개 석상에서의 표현 하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워시 의장의 이번 발언은 그런 변화의 출발점이다. 그는 백악관을 향해서는 연준 독립성에 변화가 없다고 못박았고, 시장을 향해서는 금리 경로를 미리 말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동시에 인플레이션 위험이 완화됐다는 점도 인정했다.
워시 시대의 연준은 더 강한 독립성을 말하면서도 더 적은 신호를 주는 중앙은행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 금융시장은 이제 그 새 문법에 적응해야 하는 국면에 들어섰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