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노트·비메오·AOL 품은 이탈리아 기업, 상장 흥행 뒤엔 구조조정·부채 논란도
이미지 확대보기이탈리아 밀라노의 IT기업 벤딩스푼스가 나스닥 상장 흥행에 힘입어 기업가치 230억달러(약 35조2000억원)에 육박하는 글로벌 인터넷 기업으로 부상했다.
벤딩스푼스 주가는 지난 1일(이하 현지시각) 나스닥 데뷔 첫날 40% 급등한데 이어 3일에는 기업공개(IPO) 공모가보다 24% 높은 수준에서 거래돼 기업가치가 230억달러에 조금 못 미쳤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5일 보도했다.
이번 상장으로 벤딩스푼스는 투자자들로부터 16억8000만달러(약 2조6000억원)를 조달했다. FT는 “이번 상장은 최근 몇 년간 유럽 기업이 미국 증시에서 진행한 대형 상장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고 전했다.
◇ 실패한 스타트업에서 출발
이때 동료 마테오 다니엘리가 영화 ‘매트릭스’에서 영감을 얻어 벤딩스푼스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영화 속 ‘숟가락을 휘게 한다’는 장면처럼 현실의 규칙처럼 보이는 것을 마음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다.
페라리 CEO는 IPO 투자설명서에서 당시 팀이 가진 돈은 4만달러(약 6120만원), 인원은 5명, 이력은 실패 하나뿐이었다며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름이 오히려 어울렸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벤딩스푼스는 이후 10여년 동안 조용히 모바일 앱과 인터넷 서비스를 사들이며 사업 기반을 넓혔다. 이 회사는 지금까지 AOL, 이벤트브라이트, 비메오, 에버노트 등 한때 잘 알려졌지만 성장세가 꺾였거나 재정비가 필요해진 인터넷 브랜드를 포함해 약 50건의 인수를 진행했다.
◇ 낡은 인터넷 브랜드 사들여 재건
벤딩스푼스의 핵심 사업모델은 어려움을 겪는 인터넷 기업을 사들인 뒤 비용 구조와 제품, 조직을 다시 짜는 것이다. 사모펀드처럼 부실하거나 저평가된 회사를 사들여 손질하지만 다시 매각해 차익을 얻는 방식과는 다르다. 벤딩스푼스는 인수한 회사를 장기 보유하면서 영업이익으로 수익을 내는 모델을 추구한다.
페라리 CEO는 “브랜드, 고객 기반, 제품 일부, 팀 역량 등 ‘훌륭함의 핵심’이 남아 있는 회사를 사들인 뒤 나머지를 재건해 훨씬 나은 회사로 만드는 것이 가치 창출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이 모델이 실리콘밸리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계기는 2023년 에버노트 인수였다. 에버노트는 한때 대표적인 메모 앱으로 꼽혔지만 잦은 경영진 교체와 성장 정체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벤딩스푼스는 에버노트를 인수한 뒤 미국 인력을 포함해 수백명을 해고하고, 가격을 올렸으며, 장기 이용자들이 선호하던 일부 기능도 없앴다. 이 과정에서 거센 비판이 제기됐다.
그러나 페라리 CEO는 에버노트를 회사의 대표적 성공 인수 사례로 꼽았다. 그는 에버노트의 기술 기반이 거의 완전히 다시 쓰였고 기능 구성도 크게 달라졌다며 신규 가입자가 수년간의 감소세에서 벗어나 늘었다고 밝혔다.
◇ 대규모 구조조정 둘러싼 논란
벤딩스푼스의 성장 방식에는 논란도 따른다. 인수 후 대규모 감원을 단행하는 경우가 많고 비상장사 시절에는 재무 정보 공개가 제한적이어서 인수 이후 개별 회사의 성과를 외부에서 분석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FT는 벤딩스푼스가 최근 3년 동안 전체 인수의 4분의 3 이상을 진행했다는 점도 불확실성으로 꼽았다. 짧은 기간에 사들인 여러 사업부가 장기적으로 어떤 성과를 낼지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채 부담도 크다. 벤딩스푼스의 부채는 약 44억달러(약 6조7000억원)에 이른다. 정보 공개 부족은 일부 대출기관이 벤딩스푼스에 대한 대출 확대를 꺼린 이유로 거론됐다.
페라리 CEO도 이 같은 상황이 상장 결정에 영향을 줬다고 인정했다. 그는 대출기관들이 특히 미국에서 거래되는 상장사에 돈을 빌려주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상장사는 규제를 더 엄격히 받고, 투자자와 채권자가 확인할 수 있는 정보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 700명 ‘스푸너’가 인수 기업 재정비
벤딩스푼스가 내세우는 또 다른 경쟁력은 내부 인재 조직이다. 이 회사는 직원들을 ‘스푸너’라고 부른다. 인수한 회사의 기존 인력을 줄인 뒤, 젊고 의욕적인 인재를 투입해 낡은 사업에 새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페라리 CEO에 따르면 지난해 벤딩스푼스에는 80만명이 지원했지만 실제 채용 인원은 300명 미만이었다. 회사는 헤지펀드로 갈 만한 최상위권 졸업생을 끌어들이기 위해 높은 보상을 제공한다.
직원 1인당 매출도 높다. 지난해 스푸너 1인당 매출은 257만달러(약 39억원)를 기록했고 올해 1분기에도 100만달러(약 15억3000만원)에 달했다.
에버노트와 하베스트를 이끄는 29세 플로린다 판노피노는 인턴으로 입사해 포트폴리오 기업 책임자까지 올랐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팔을 걷어붙일 의지가 있다면 근속연수나 나이와 상관없이 기회가 열려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 인공지능 기업보다 ‘아직 이기지 못한 회사’ 겨냥
벤딩스푼스는 앞으로도 인수 기회를 계속 찾을 계획이다. 페라리 CEO는 구체적인 인수 대상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검토 대상이 100곳가량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인공지능(AI) 기업은 당장 주요 인수 대상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AI 기업들은 대부분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미 높은 에너지와 혁신성을 갖고 있어 벤딩스푼스가 더해줄 수 있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벤딩스푼스는 아직 시장에서 ‘이미 이기고 있는’ 회사가 아니라, 브랜드와 고객 기반은 있지만 구조적 개선이 필요한 회사를 겨냥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상장 이후 자금 조달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벤딩스푼스는 과거 지분 희석을 피하기 위해 주식 발행을 꺼렸지만 상장사로서 매력적인 인수 기회가 생기면 주식 교환 방식의 거래도 선택할 수 있다고 페라리 CEO는 설명했다.
다만 성장 모델의 한계도 있다. 벤딩스푼스가 소수의 고강도·고역량 직원 집단에 크게 의존하는 만큼, 이 방식이 계속 커지는 인수 포트폴리오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향후 시험대가 될 수 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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