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6 15:00
며칠 새 창 너머로 보이는 초등학교 운동장가의 대왕참나무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김영민 교수는 ‘가벼운 고백’이란 책에서 “상반기가 속절없이 가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음력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조락(凋落)의 계절, 가을이 되면 나 역시 세월이 여울물 소리를 내며 빠르게 흐르는 것을 느낀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드는 것도 스치듯 빠르게 지나가는 가을을 오래 간직하는 방법이 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설악산행이었다. 지난여름에도 다녀왔는데 또 가느냐는 핀잔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낭을 챙겨 설악으로 향했다. 한계령에서 시작해 대청봉까지 올랐다가 중청, 소청을 거쳐 희운각 대피소에서 1박을 하고2024.10.09 13:08
하늘이 열린다는 개천절날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백운대를 올랐다. 개천절처럼 명토 박힌 날은 집안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기보다는 왠지 산에라도 올라 일출을 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백운대는 북한산국립공원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북한산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 만경대, 인수봉과 함께 삼각산이란 이름을 낳게 한 세 봉우리 중 유일하게 도보 산행이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백운대는 북한산 특유의 장쾌하고 시원한 바위산의 조망이 펼쳐져 일출 장소로도 인기가 높은 곳이다.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검푸른 새벽, 자전거를 타고 우이동 버스 종점까지 이동한 뒤 신발끈을 조여 매고 도선사 주차장을 향해 비탈진 산2024.09.23 13:26
완연한 가을이다. 좀처럼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던 무더위도 비에 쓸려간 듯 바람은 싱그럽고, 드높아진 하늘에서 쏟아지는 투명한 햇살은 세상의 초목들을 따사롭게 감싸며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내 주위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를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밖으로 나가 자연 속을 걷는 것이다. 창을 통해 바라보는 조각난 하늘보다 밖으로 나가 고개 젖혀 하늘을 바라보며 떠가는 구름과 구름을 밀고 가는 바람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껴보는 것이다. 어제와 사뭇 달라진 먼 산빛과 나뭇잎에 이는 바람결의 변화를 읽다 보면 내 안에도 가을빛이 들어찬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천변엔 억새와 수크령, 강아지풀과 같은 볏과의2024.09.11 16:11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지만 요즘 바깥 풍경은 차를 타고 가며 보면 가을, 차에서 내리면 여름이다. 에어컨 잘 나오는 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은 가을이 분명한데 차에서 내리면 땡볕이 후끈한 열기를 쏟아놓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쾌청한 하늘이 너무 좋아 드라이브를 나섰다가 태릉에 다녀왔다. 처음부터 태릉에 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촉수 잘린 개미처럼 정처 없이 거리를 맴돌다가 우연히 찾아든 곳이 태릉이었다. 30여 년 전, 태릉 가까이에서 살았던 터라 지명은 익숙하지만 스쳐 지나쳤을 뿐 정색하고 들어가 본 것은 처음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장권을 끊고2024.09.04 15:09
선자령에 다녀왔다. 선자령은 강원도를 영동과 영서로 나누는 ‘바람의 언덕’이다. 해발 1157m의 선자령은 높은 곳이지만 옛 대관령휴게소(840m)에서 출발하면 경사가 완만해서 산책하듯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정상에 서면 발왕산, 계방산, 오대산, 황병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능선을 따라 서 있는 거대한 풍차가 돌고 있는 모습은 장엄하면서도 이국적이다. 여행의 목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한낮의 불볕더위와 열대야에 지친 몸을 추슬러 선자령으로 떠난 것은 그 풍경 속에 슬쩍 나를 끼워넣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속 6~7m 이상의 바람이 1년 내내 부는 그곳에서 더위를 날려버리고 다른 사람보다 한발 앞서 가을2024.08.28 14:58
장마가 물러가도 폭염의 기세는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모르고 후텁지근한 무더위의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여름이 가기 전에 사랑을 이루고픈 매미들의 애절한 떼창에 선잠에서 깨어 창문을 여니 후끈한 열기가 나를 덮쳐온다. 이 소리는 분명 애매미 소리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소리의 진원지는 옆집 가죽나무다. 애매미는 은빛 햇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가죽나무 잎 사이, 어느 가지엔가 매달려 울고 있을 것이다. 애매미는 여름 막바지에 우는 매미로 알려져 있는데 이 뜨거운 여름이 잦아드는 저 매미 소리 따라 얼른 물러갔으면 싶다. ‘봄은 향기로 오고 가을은 소리로 온다’고 했던가. 조용히 눈을 감고 바람 소리에 귀2024.08.19 17:54
고향에서 벌초 날짜가 적힌 문자가 왔다. 더위를 견디느라 날짜 가는 줄도 몰랐는데 벌써 벌초할 때가 되었나 싶어 달력을 보니 오는 22일이 24절기 중 열네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인 처서(處暑)다. 처서는 더위의 정점인 입추(8월 7일)와 ‘흰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9월 7일) 사이에 들어있다. 여름내 뜨거웠던 더위가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처서.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도 누그러져 나무들은 물 길어 올리기를 멈추고 한해살이풀들도 더는 자라지 않기 때문에 논두렁의 풀을 깎거나 산소를 찾아 벌초하는 것이다. 예전의 아녀자들과 선비들이 여름 동안 장마에 젖은 옷이나 책을 음지(陰地)에서 말리는2024.08.19 11:41
김유정역이 사람의 이름을 딴 역이라면 소요산역은 산의 이름을 그대로 빌려 역명을 지었다. 1호선 전철을 타고 동두천의 소요산역에 내리면 곧바로 경기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소요산을 오를 수 있다. 소요산의 산세는 그리 웅장하지는 않으나 석영 반암의 대 암맥이 산 능선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경기의 소금강으로 불릴 만큼 경승지(景勝地)로 유명한 산이다. 동두천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이 이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국사봉을 주봉으로 왕방산·해룡산이 둘러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천보산의 회암령에서 서북으로 칠봉산이 남쪽의 경계를 이루는데 소요산은 국사봉 서쪽 산록에 우뚝 솟아 아름다운 자태를2024.07.23 10:06
수락산에 다녀왔다. 이 무더운 장마철에 수락산을 오른 것은 수락산 정상에 바위채송화가 한창이라는 친구의 전언 때문이었다. 북한산국립공원 아래 사는 덕분에 북한산과 도봉산은 심심찮게 오르내렸으나 수락산 등산은 오랜만이다. 불암산과 함께 ‘돌산’으로 불려왔던 수락산은 수려한 산세와 힘찬 기운을 품고 있어 예로부터 조선 왕실과 지사들의 사랑을 받았던 곳이다. 아주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의 삶 속에 위로를 건넨 수락의 기상을 온몸으로 받으며 바위산을 올랐다. 금세라도 한 소나기 할 것만 같은 후텁지근한 무더위와 싸우며 마지막 힘을 내어 해발 638m의 수락산 정상에 오르니 강북 도심의 풍경과 북한산, 도봉산, 사패산 능선이2024.07.16 09:23
도봉구에 사는 행복 중의 하나는 문밖만 나서면 어디서나 기암산수화를 직접 눈으로 불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산국립공원과 잇닿아 있어 고개만 돌리면 북한산과 도봉산의 암봉들이 최고의 산수화를 펼쳐 보이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북한산을 다녀온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다시 도봉산을 올랐다. 이른 새벽, 자전거를 타고 창포원으로 꽃구경을 갔다가 바라본 도봉산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북한산국립공원에 속한 도봉산은 서울 북쪽 도봉구와 경기도 양주 경계에 있는 산이다. 최고봉인 자운봉(739.5m)을 비롯해 만장봉, 선인봉, 주봉, 오봉, 우이암 등의 암벽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산이다. 시인 박두진은 시 '도봉'에서 “산새도 날아와2024.07.09 09:41
‘연꽃이 피었을까?’ 꽃에 핑계를 대고 바람도 쐴 겸 오랜만에 두물머리를 다녀왔다. ‘등대수’라는 관료 냄새 나는 명칭보다 ‘등대지기’라는 말이 거룩하게 들리듯 나는 ‘양수리(兩水里)’라는 행정구역상 지명보다 ‘두물머리’란 우리말 지명이 훨씬 정겹게 느껴진다. 팔당호를 가운데 두고 북한강과 남한강 두 줄기가 합쳐진 곳이라 이름도 양수리가 되었지만 한글로 표기하는 두물머리가 묘한 매력을 자아낸다. 소설가 이윤기의 단편집 '두물머리'로 더욱 유명해진 이곳은 드라이브 코스나 카페촌으로 꽤 알려진 곳인데 한여름엔 세미원의 연꽃이 더해져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오래된 느티나무들과 드넓은 호수에 새벽에 피어2024.07.02 09:16
오랜만에 북한산 백운대를 올랐다. 야간 산행을 금하고 있어 백운대 정상에서 일출을 볼 수는 없었지만 동트기 전의 새벽 산행은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레어 발걸음이 자꾸 빨라진다. 새벽빛이 스며든 숲 그늘의 어슴푸레한 어둠과 등산로의 표정 없는 바위들을 밟을 때마다 나는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딛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고 신중해진다. 새벽에 잠을 깨어 할 일이 마뜩지 않을 때 산행을 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새벽에 산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신령한 아침 기운을 받으며 산이 깨어나는 모습을 어찌 볼 수 있겠는가. 백운대를 올라봐야겠다고 처음 생각한 것은 백운대에 ‘러브버그’(붉은등우단털파리)가 대거 출현했다2024.06.18 09:19
“…청봉이 어디인지. 눈이 펑펑 소청봉에 내리던 이 여름밤/ 나와 함께 가야 돼. 상상을 알고 있지/ 저 큰 산이 대청봉이지./ 큼직큼직한 꿈 같은 수박/ 알지. 와선대 비선대 귀면암 뒷길로/ 다시 양폭으로, 음산한 천불동/ 삭정이 뼈처럼 죽어 있던 골짜기 지나서/ 그렇게 가면 되는 거야. 너는 길을 알고 있어/ 아무도 찾지 못해서 지난주엔 모두 바다로 떠났다고 하더군/ 애인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나 나나 행복했을 것이다.…” -고형렬의 ‘대청봉 수박밭’ 일부 설악산 대청봉을 떠올릴 때마다 부록처럼 따라오는 시가 속초가 고향인 고형렬의 ‘대청봉 수박밭’이다. 이 시를 대청봉을 오르기 전에 알았는지 정확지는 않으나 이 시를 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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