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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트럼프의 관세 명령, 美 보수 진영이 만든 ‘중대 질문 원칙’에 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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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트럼프의 관세 명령, 美 보수 진영이 만든 ‘중대 질문 원칙’에 발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30일(현지시각) 워싱턴DC 백악관 집무실에서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30일(현지시각) 워싱턴DC 백악관 집무실에서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상대로 부과한 관세 명령이 자칫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적 근거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 보수 진영이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의 정책을 막기 위해 만든 법적 원칙들이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에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국제무역법원이 트럼프 대통령이 발동한 전 세계 국가 대상의 관세 조치를 위법이라고 판결한 근거가 주목된다고 지난달 31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다.

미 국제무역법원은 이 판결의 근거로 ‘중대 질문 원칙(major questions doctrine)’과 ‘로퍼 브라이트 대 라이몬도(Loper Bright v. Raimondo)’ 판결 등을 인용했다. 이 원칙은 미 의회가 명시적으로 위임하지 않은 중대한 사안에 대해 행정부가 독자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 판결에서 재판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무역 불균형이나 펜타닐 유입 등 광범위한 문제 해결을 이유로 관세를 무분별하게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난 1977년 제정된 ‘국제비상경제권법(IEEPA)’은 특정 외국 위협에 대응할 때만 대통령이 제재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며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명령은 이 법의 취지를 넘어섰다는 게 판결의 요지다.

미 국제무역법원은 “대통령이 IEEPA를 활용해 ‘압박’이나 ‘지렛대’ 전략이라는 명분으로 어떤 조치든 취할 수 있다고 본다면 이는 명백히 의회의 입법 취지를 벗어나는 해석”이라고 판단했다. 판결을 내린 세 명의 판사는 각각 로널드 레이건, 버락 오바마,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지난달 30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번 끔찍한 판결은 관세를 부과하려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며 “이게 나를 향한 증오 때문이 아니라면 뭐겠느냐”고 주장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항소에 나섰으며 관세 판결의 효력은 일시적으로 정지된 상태다. 법무부는 중대 질문 원칙이 대통령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은 환경보호청(EPA)과 같은 연방기관이 아닌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해온 주요 정책 대부분이 이 원칙에 따라 위법 판결을 받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 캠퍼스(UC데이비스)의 아론 탕 법학과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의 거의 모든 굵직한 정책은 정치적, 경제적 파급력이 크고 법적 근거가 약하다”며 “이런 유형이 바로 중대 질문 원칙의 적용 대상”이라고 밝혔다.

이 원칙은 원래 보수 진영에서 만들어낸 법적 틀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학자금 탕감이나 환경 정책을 제한하는 데 활용됐다. 그러나 이 원칙은 이제 보수 진영의 핵심 인사였던 트럼프 대통령 본인의 권한을 제한하는 데 쓰이고 있다.

진보 성향의 브레넌센터의 마이클 월드먼 소장은 “법원이 바이든에게 했던 것처럼 트럼프에게도 견제 장치를 작동시킬지 여부가 사법부의 신뢰를 가늠할 시험대”라고 말했다.

보수 진영 내에서도 이러한 흐름에 동의하는 시각이 있다. 보수 법률단체인 신시민자유연합의 마크 체노웨스 대표는 “이 원칙은 정파적 기준이 아닌 헌법적 기준이며 어느 정당 소속 대통령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과거 바이든 행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던 주체 중 하나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참모였던 스티븐 밀러가 세운 보수 성향의 법률단체인 아메리카퍼스트리걸은 “대통령은 단순한 관료조직이 아닌 하나의 정부기관이므로 EPA와 같은 연방기관처럼 제한돼선 안 된다”며 예외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법원 판결은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운 행정명령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난달 메리 맥엘로이 로드아일랜드 연방지법 판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과 인프라 예산 집행을 중단시킨 행정명령이 중대 질문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같은 해 2월에도 워싱턴DC 연방지법의 로렌 알리칸 판사는 외교 지원, 민간단체, 성소수자 및 환경 관련 예산을 중단시킨 트럼프 행정명령에 대해 위헌 소지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같은 일련의 판결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이 지명한 보수 성향 대법관들의 손으로 만들어낸 판례들이 오히려 자신의 정책 추진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고 WSJ는 덧붙였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