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03 06:43
도인이 우광 무사 같기도 하고, 이순신 장군 같기도 하고, 아마도 실제로 본 것인지, 꿈에서 본 것인지 아리송하다. 달이 둥실 떠있다. 제단에서는 이화 무사가 청소하고 있었다.“몽시에 용이 나타나서 공주님이 기다리니 제단에 가보라고 하더군.”이화 무사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드디어 공주님을 만날 때가 되었나! 아버지는 반드시 칼빛이 다시 올 거라며 제단을 지켜라 엄명하시었네. 긴 세월이 흘렀네. 늙은 이 몸이 소명을 다하지 못하고 눈 감는 건 아닌가 싶었네. 그나마 떳떳하게 아버님을 뵙게 되어 다행일세!”제단 위에 쌍룡검이 놓여있었다. 모처럼 쌍룡검은 제자리를 찾았다. 원래부터 쌍룡검은 하나였고, 그 자리에2015.03.31 09:08
“이제 비전검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느냐?” 아무는 음성이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두건을 쓴 늙은 도인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서 있었다. 한 눈에 절공의 고수임을 그의 운기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아무는 깊이 고개 숙여 예를 올린다.“부디, 비전검법을 해독할 가르침을 주십시오!”늙은 도인은 부동의 마음으로 말한다.“그동안 족히 수련해 온 바, 그 정성이 스스로 가르칠 것이다. 무엇을 더 바라는 고?”아무는 도인을 우러러보며 진심을 전한다.“닦은 그릇이 넓지 못하여 근본을 온전히 담지 못하니, 본심을 그르칠까 싶어 배움을 청합니다.”도인은 그제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네가 알고 있는 바가 깨달음이다.2015.03.30 08:05
의구심이 들었던 용풍우락 연대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설화가 아니었다. 강무사 가족의 목숨을 건 실행이 그 가치를 밝힌 셈이다.“우리의 소명은 빛의 무사 대를 잇는 것이다. 혼신을 다해 아버님은 비전검법을 해독하여 대를 이을 무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아버님의 영혼은 편히 쉬시겠구나!”강무사는 검령산 제단 위를 지극 정성으로 빗질을 한다. 오랜 먼지가 씻겨진 뒤에 차츰 흐릿하게 작은 돌구멍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노트에 그려졌던 천문도가 제단 바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단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고인돌이었다. 먼지에 쌓여 진면목이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보아라! 빛의 무사들이 대를 이어 지킨 용풍우락 비2015.03.29 10:11
제단에는 강무사가 홀로 서 있다.“비전검법을 찾았는가?”“용풍우락 기세를 보았습니다. 용의 초력을 보니, 대삼합의 검법이 이해가 되더군요.”“허허! 잉어를 잡기 위해 낚시줄을 드리우고 오래토록 기다렸건만, 용은 자네가 낚았구먼!”“보기는 했습니다만, 아직 참 뜻은 모르겠습니다.”“사대(四代)를 이어 기다렸네. 드디어 비사를 만나게 되었구먼! 대를 이은 정성이 하늘에 닿은 걸세. 도대체 무슨 까닭에 무신이 자네를 선택했다고 생각하나?”“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단지 하늘이 가라면 가고, 떠나라면 떠날 각오를 할 뿐입니다.”“자네가 무신의 어떤 기운을 받았는지, 신명을 헤아려 보겠네.”강무사는 낚시대를 공중으로2015.03.27 14:22
용불은 칼집에 칼을 꽂고는 고개 숙여 인사한다. “어디로 가는 거냐?”용불은 눈에 빛을 내며 말한다.“북녘으로 갑니다. 벽을 허물고, 자유를 되살려야지요. 용인 척하는 이무기를 제거할 겁니다!”“왜 그런 힘든 일을 계속하는 거냐?”“무사는 제물입니다. 정의를 향해 바치는 제물! 이순신 장군이 조국의 자유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제단에 바쳤듯이! 무사의 사랑은 작은 협의의 집착을 버리고, 대의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어둠을 버리고, 빛을 바라보는 본심에서 칼빛이 나옵니다.”아무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는데 차마 입가에서 맴돌 뿐이다. 용불의 떠나가는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내 빛은 아무것도 아니다! 진정 빛을 발할 가2015.03.26 10:19
“사부님은 선배님이 비전검법을 해독할 능력이 있음을 알아보셨습니다. 난, 사부님이 왜 그랬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선배님이 그저 부러웠습니다. 천하제일 검의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진정한 남자의 사랑을 받았으니까요!”“내가 알고 있는 마지막 비사는 김구 선생이시지. 어머니이신 곽낙원 여사는 일흔 살까지 인천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셨지. 아들이 보낸 용돈을 되돌려 주시며, 큰 빛을 내는 사람이 사사로움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며, 꾸짖으셨네. 빛은 일일세. 일은 빛이고, 빛을 낳는 거인은 초월자라는 증거일세. 감히 내가 그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무사와 견줄 수는 없네.”“백범과 아무!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사람, 가2015.03.25 07:20
거짓말같이 소란스런 소리는 숲속에 묻혀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풀벌레들이 여기저기서 울기 시작한다.누군가 정적을 타고 다가온다. “다시 돌아 올 줄 알았습니다. 이걸 찾는 건가요?”아무는 아사의 도깨비 탈을 내밀었다. 보름달 빛에 어느 정도 얼굴이 보이는 거리였다. 괴한은 잠깐 호흡을 고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탈을 잃는 것은 아사의 정신이 끊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찾으러 온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다면 안심이 되는군요. 나는 어차피 먼 길을 떠날 몸, 이제부터 당신이 탈을 간직하십시오.” 괴한이 돌아서려 하자, 아무는 급히 말한다. “가져가세요. 공연히 살인 사건에 연루되기 싫군요. 난 당신이2015.03.24 08:22
장두범 형사가 정색하면서 냉엄하게 말한다.“그렇다면, 사범님은 사건의 흐름을 다 파악하신 겁니다. 누가 이노우에를 죽였는지도 사범님은 알고 있습니다. 범인은 누구죠? 이노우에는 거합도 7단입니다. 그런 고수를 한 칼에 절명케 한다는 것은 대단한 고수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현장에 여자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단검으로 이노우에를 죽였다면 단검을 탕비실에 두고 가지 않았을 겁니다. 단검은 범행 흉기가 아닙니다. 왜 단검을 탕비실에 버리고 갔을까요? 정치인의 아들인 의사의 손목을 자른 이는 누굴까요? 그가 동일범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혹시 사범님 아니십니까? 이 과정에 연관된 이는 사범님뿐입니다.”으흠, 하며 아무2015.03.23 09:15
“어떻게 일본인과 중국인 협객이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돌아가신 우광 선생은 당신이 죽인 겁니까?”“아! 단지 범인을 잡으려고 한 것뿐인데, 외국 무협들과 서로 협조하여 정보를 나누긴 했죠. 내가 창고에서 쏜 분이 우광 무사일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왜 그 분을 쏘겠습니까!” 장두범 형사는 당황한 듯이 코를 킁킁거리며 세게 푼다.“아,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메모지와 호랑이 발자국이 검법에 관련됐다고 추측한 제 아이디어가 맞았습니다. 다른 형사들은 비웃었습니다만, 올바른 판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일본의 야쿠자와 중국의 삼합회까지 가세한 겁니다. 야쿠자들은 호랑이 발자국을, 삼합회는 검결가 노트에 관심이2015.03.20 10:13
아리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아무는 미칠 듯한 마음의 갈증을 해결할 답을 찾기 위해 보름달이 뜨자마자 검령산에 올랐다. 달의 제전. 모든 게 인연에서 시작되어 인연으로 끝난다. 푸른 옷을 입은 무사는 나타났으나, 빨간 옷을 입은 무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달은 창끝 같은 나뭇가지에 찔려 고통을 받다가 구름 속으로 숨어든다. 밤하늘에 별들 사이, 누구의 쌍칼로 꿈을 막는지, 노래 소리조차 닿지 않는 거리에서 북두칠성이 빛나고 있다. 우리네 인연이 이와 같다면 다시 못 만날 별빛을 붙잡고 서럽게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아, 언제쯤 자유롭게 오갈 묘법을 가질 것인가!’ 비통함을 가진 무사가 애처로이 주저앉는다. 귀2015.03.19 13:18
잉어가 튀어 오르고 비파 소리를 내며 강물이 흐른다. 강무사와 딸은 다시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다는 듯이 힘껏 끌어안는다.아리는 가방에서 일엽검을 꺼내 강무사에게 준다. 강무사는 다시 돌아온 일엽검을 소중히 가슴에 품고 하늘과 산을 향해 절을 한다. 이제야 어머님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딸이 소원을 풀어 주었다. 강무사는 일엽검을 척, 펼쳐 들고 검무를 추기 시작한다. 몽운검으로 해를 상징하는 검령산을, 일엽검으로 달을 상징하는 예봉산을 끌어들여 팔자로 휘어 저으니, 호수 물이 용솟음치듯이 출렁인다. 문무를 갖춘 검무가 완성되었다.그 때, 숨어 있던 자객이 던진 단검이 기습하여 온다. 아리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2015.03.18 07:21
아무는 전철을 타고 한강 철로를 건너고 있었다. 출입문에 서서 창밖 물결을 바라보다가 문득, 창문에 비친 반대편에 앉은 여인이 눈에 띄었다. 긴 가방을 무릎 사이에 세워둔 여인은 챙이 넓은 모자로 살짝 얼굴을 가렸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 사이, 전철 안에는 강물 빛이 흘러들었다. 물빛은 세세하게 스며들며 반응하는 성질이 있는데, 여인은 강물 빛에 다른 사람들처럼 흐려져 묻히지 않고 유달리 빛났다. 물의 파동을 넘는 독특한 파동을 내었다. 고도로 훈련되고 집중된 감각이 드러난 것이다. 아무는 감각적으로 특이점을 알아챘으나, 남몰래 내면을 들여다보는 무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아서 관심을 재빨리 지워버렸다. 아무는 팔당역에2015.03.17 08:10
만주 광야 수련 중, 조선 검법의 고수를 제거하기 위해 밀파된 일본 자객을 맞이하여 목숨을 걸고 싸운 우광. 일본 검술 일도직류(一刀直流)의 최고수 도띠야스는 총독부에서 복수를 위해 특명을 내린 인물이었다. 우광은 도띠야쓰와 그의 부하 다섯 명을 제거하였지만, 등에 큰 칼자국을 얻었다. 하지만 큰 마음의 상처를 얻은 것은 조국의 시대 상황이었다.모두들 서양화와 상업화로 가는 것이 유일한 길인 양 달려갈 때, 오히려 그 때가 제일 힘겨웠다. 일제 시절의 강제 병합에 따른 핍박은 이겨 낼 수 있었으나, 조국에서 무사 가치의 몰락은 고통이 더 컸다. 누구도 배우려 하지 않는 검법 도장을 접고, 제자들마저 떠나는 상실감에 따른 혈2015.03.16 10:16
미국 LA에 살던 조천명 사범이 갑자기 귀국했다. 장례식에 꼭 방문해 주길 바란다는 편지를 받고는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날아 온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영정을 확인하고는 조천명은 놀라서 주저앉았다. 영정은 사십년 전에 돌아가신 우광 무사의 얼굴이었다. 돌아가신 우광 무사가 지천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사십 여년을 더 사신 것이다. 수제자에게도 감춘 사부님의 사연이 궁금했다. "자네는 왜 검도를 하려는 건가?""칼의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무사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아는가?""대의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자가 무사입니다!"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우광 무사가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호랑이의 눈처럼 불이 났다. 가슴2015.03.14 10:56
늙은 여협은 지팡이를 옆으로 벌려 눕힌다. 순간, 모든 기세가 캄캄한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지니, 그 심지의 깊이를 잴 수가 없다.“우주가 누움은 그 시작이며 끝이오. 빛을 내는 것은, 일을 하는 것은 모두 서 있소. 별도 빛도 살아 있는 것은 세워진 것이오. 사람도 세워지면 살아 있는 것이오, 누우면 죽은 것이오. 서로 의지하여 서는 것이 사람이오. 하늘이 세우고, 땅이 세우고, 인간이 세워 산자가 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무사의 길이오. 그러니 고난을 밝음으로, 역경을 기쁨으로 만드는 소용돌이가 검은 길이오(陰陽始終石 黑行). 어둠 중에서 빛나는 별이 있으니, 천년만년 스스로 빛내어 어둠을 밝히오. 그 별자리를 따라가는 자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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